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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5) <제자는 필자>|<제26화>경무대 사계 (2)|윤석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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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환국>
45년10월16일 하오 5시 한대의 미 군용기가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중절모를 쓴 백발의 노신사가 「트랩」을 내려 한참이나 주위 풍경을 응시했다.
그를 마중 나온 것은 군정청의 미군 장교들-. 그는 구형 「세단」에 올라타고 미군 장병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김포 가도를 지나 조선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바로 그 노신사는 미국에서의 망명 생활에서 33년만에 조국 땅을 밟는 이승만 박사였다. 광복 운동의 지도자가 해방된 조국에 첫 발을 딛는 감격의 순간 치곤 너무도 조용하고 쓸쓸했다.
그의 이렇듯 쓸쓸한 환국은 그 시간 누구도 그의 환국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의 환국을 사전에 알고 있었던 것은 그에게 군용기를 내준 동경의 「맥아더」 사령부. 그리고 「맥아더」 원수의 연락을 받은 한국 주둔 미군 사령부 장성들뿐이었다.
이 박사의 환국을 맨 먼저 알게된 한국인은 그의 여행 가방을 방으로 옮겨 나른 조선 「호텔」의 종업원이었다. 이 박사의 숙소는 「하지」 장군이 미리 예약해둔 3층 특실이었는데 이 종업원은 미군 장교의 정중한 안내를 받으며 들어서는 손님의 조그만 손가방에 꽂힌 명함에서 「이승만」을 읽은 것이다.
이 박사는 맨 먼저 부름을 받고 달려온 윤치영씨가 『어떻게 소식도 없이 환국하셨습니까』고 했을 때 『요란스럽게 돌아올 입장도 못 되잖아』라고 했다. 『미리 알려 주시지 않으시고…』라는 사람마다의 원망에 이 박사는 『나는 요란한 것을 좋아하지 않거든, 내가 무슨 대단한 일을 했다고…』라고도 했다. 이런 얘기로 미루어 이 박사는 동경에서 「맥아더」 원수에게 그의 환국을 알리지 말도록 부탁했고 「맥아더」 원수도 이 뜻을 그대로 받아 「하지」 중장에게 「호텔」까지는 비밀히 모시라고 지시했던 것 같다.
조선 「호텔」에서 그 밤을 쉰 이 박사는 17일 아침 10시, 미 군정청이 주선한 기자 회견을 위해 군정 미 회의실 (지금의 중앙청 제1회의실)에 처음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10시 정각 흰 장갑을 낀 미군 헌병 2명이 들어와 부동 자세로 서자 뒤이어 점령군 사령관 「하지」 중장이 (Please come this way) (이쪽으로 오시지요)라고 되풀이 말하면서 이 박사를 안내했고 이 박사 뒤를 군정 장관 「아놀드」 소장이 따라 들어왔다.
그 당시 「하지」가 기자 회견을 할 때는 이 회의실 상좌에 붉은 가죽의 고급 안락의자 하나를 놓고 그 자리에 앉았었다. 이 날은 꼭 같은 그런 의자가 둘 나란히 놓여 있었다. 이 박사는 들어서자 의자에 앉았으나 「하지」 장군은 그대로 부동 자세를 취하고 서 있었다. 이를 보고 이 박사가 잠시 후에 『General, please sit down』 (장군 앉으시오) 이라고 말하니까 그때야 이 박사 옆자리에 단정히 앉았다.
이 박사는 33년만에 처음으로 하게 되는 우리말이 선뜻 나오지 않았든지 첫 얘기는 영어로 말하고 우리말로 떠듬떠듬 번역해 되풀이 말하는 것으로 귀국 제1성을 시작했다.
이 박사는 난마와 같이 얽힌 정국 얘기를 외지를 통해 읽어 안다면서 <시심과 단결을 강조했다. 이 박사는 『나는 임시 정부의 대표도 아니고 주미 위원회의 책임자도 아니며 대한 민국의 한 시민으로 귀국했다』고
그 무렵 국내의 최고 권력자는 「하지」장군이었다. 누구에게나 첫 자리를 내놓을 필요가 없었던 그런 그가 이날 이 박사에게만은 최고의 예우를 한 것이다. 이 박사는 8·15와 더불어 그 명망이 국내에 전해지기 시작했지만 이 기자 회견에서 『과연 민족의 지도자가 왔구나』라는 인상을 강렬하게 느꼈다는 것이 회견에 참석했던 기자들의 얘기였다.
이 박사의 환국은 회견 직후 각지의 호외를 타고 장안에 퍼져갔다.
이 박사는 그날 밤엔 경성 중앙 방송국에 나갔다. 『…돌아와서 그립던 산천과 고국 남녀동포를 만나니 기뻐서 웃고도 싶고 울고도 싶습니다.…내가 조선에 소문 없이 온 것은 비밀관계나 어떤 연락이 있어서 온 것이 아닙니다. …미국인들이 우리에게 한번 기회를 주자는 것이나 사감과 사리를 버리고 합동 협력하여 회복을 주장하면 잘 될 수 있을 것을 나는 확신하는 바입니다….』 그는 또박또박 「귀국의 말」을 전파에 실었다.
이 박사의 환국 무렵 국내 사정은 40여개의 정당이 난립하여 혼란에 휩싸여 있었고 좌우를 막론하고 이들 정당들은 저마다 이 박사를 그들 단체의 지도자라고 서로 내세우고 있었다. 이런 정계의 혼돈 때문에 이 박사와 김구 등 상해 임정 요인에 대한 기다림은 국민적 열망이었다.
이런 열망이 너무도 절실했기 때문에 이 박사의 예고 없었던 뜻밖의 귀국 소식은 더욱 환희와 감격을 몰고 삽시간에 번져갔다.
이 박사는 기자 회견에 나가기 전인 이른 아침 맨 먼저 윤치영씨 (초대 내무장관)를 불렀다. 윤씨는 「프린스턴」 대학의 이 박사 후배이자 미국서 얼마동안 독립 운동을 돕기도 했었다.
윤씨는 이 박사가 동경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 환국 맞이 준비로 쏘다녔고 16일에도 늦게까지 고 장덕수 선생, 임영신 여사 등과 함께 이 문제를 의논했었다.
뜻밖에도 이 박사의 전화 부름을 받은 윤씨는 부인과 함께 「호텔」로 달려가 이 박사를 모시는 일을 맡았다.
이 박사의 환국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호텔」엔 방문객이 밀렸다. 윤씨에겐 국내 정세의 「브리핑」, 방문객의 처리에 눈뜰 새 없는 나날이 시작된 젓이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구호를 내걸고 난마 같은 정치 세력의 통합에 나서면서 공과 사로 뒤범벅된 고국에서의 이 박사의 생활도 시작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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