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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0)<제 25화><「카페」시절>(12)이서구<제자는 필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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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홈·바」말이 났으니 말이지, 술이란 슬퍼도 마시고 기뻐도 마신다. 그래서 잔치에는 반드시 술이 있어야하며 장례에도 없어서는 안 된다. 그 중에서 기쁨을 나누기 위하여 서로의 행운을 비는 뜻으로 술잔을 같이 들고 마시는 버릇은 흔해 빠진 예사이지만 이런 따위의 행위를「건배」라 하니 그 뜻인 즉 술잔을 같이 들고 기쁨을 함께 하기 위하여 술잔을 비운다는 것이겠지만 소위 그 건배라는 식의 풍습은 서양에서 들어온 주도의 하나로「카페」나「바」에서 한창 성행 중이었다.
『자! K군과 I양의 사랑을 위하여….』
누구인가 잔을 높이 들면 모두가 이에 호응하게 마련이다. K군은 술값을 내는 사람이고, I양은 K군 곁에 앉아있는 당번여급인 경우 축배의 의의는 자못 착잡해진다. 울면서 겨자국 먹듯이 고맙지도 않은 축배도 받아야만하고 쓰라린 가슴을 억누르고 이에 호응하는 경우 진실로 건배란 쓰라린 시련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일은 권모술수가 헤아릴 길 없는 국제관계에 가장 심각하다. 대한제국이 마지막 넘어가고 창덕궁에서 일본천황의 처분만 기다리던 강희황제는 초조했다. 나라를 송두리째 일본천황에게 빼앗기고 보니 무슨 명색으로 남은 세월을 보내야할는지 눈앞이 캄캄했다.
한·일 합병 조문에 한국황제폐하는 일컬어「창덕궁 이왕 전하」로 격하되었으니 서글픈 이야기다. 강희황제는 기가 막혀서 도무지 말이 없었다.
그나마 그냥 버려나 두었으면 좋으련만 일인들은 기어이 황제를 이왕으로 강봉한다는 일본천황의 칙서를 내린다고 법석이니 이 어찌 차마 겪을 일이겠는가. 그러니까 대한제국 강희 4년(1910)8월22일에 한·일 합병조약이 체결된 직후 일본 궁내생 도섭 시종이 일본 천황이 내리는「이왕책봉칙서」를 가지고 창덕궁으로 온다는 것이다.
이제는 할 수없이 일본천황의 신하가 되기는 했지만 창피스럽기 짝이 없다. 이때까지 자기가 앉아서 3천리강산을 굽어보던 인정전5봉 병풍 앞 옥좌에는 일본천황의 칙사가 앉고 황제는 그 앞에 허리 굽혀 칙서를 받게되니 아마 나라 빼앗긴 울분보다는 한층 긴절한 아니꼬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눈물을 머금고 일인들이 시키는 대로 이왕으로 봉한다는 척서를 두손으로-허리를 굽히고 받아야만했다.
여기까지는 간신히 참았으나 또한 고비가 남았으니, 난처했다.
『자…동행 각에 가서 축배를 듭시다.』
무엇이 기뻐서 축배를 든단 말인가, 아찔했다.
그러나 모면할 도리는 없다. 이때 나온 술이「샴페인」이다. 이 술은 경축할 때 쓰는 술이요 병마개를 뺄 때 가벼운 폭음이 나서 흥을 돋운다. 아직도 명색만 걸려있는 궁내부대신 민내석 시종원경 윤덕영 시종무관장 이병무등이 이제는 이왕으로 떨어진 황제를 끌고 동행 각으로 갔다. 주안상이 미리 마련되고「샴페인」술병이 늘어 놓여있다. 장차 이날의 영광을 축하하는 건배를 높이 들고 『천황폐하만세』를 세 번 부를 참이다.
이때 황제는 얼마나 분통하였을 것인가. 아니 분통은커녕 부끄럽고 창피해서 어떻게「샴페인」잔을 들고 만세를 부르겠는가. 견디다 못한 황제는 술잔을 떨어뜨리고 의자에 주저앉으니 눈치 빠른 시신들은 일본인에게 질책이나 받을까 겁이 나서 모두들 둘러싸고
『전하께서, 아마 몹시 피곤하신가보다』고 핑계를 하여 겨우 무사히 됐다지만「바」나「카페」에서 돈을 물 쓰듯 기고만장한 젊은이들이 『야! 기분 좋다.「샴페인」이나 뻥·펑! 터뜨려라. 』소리를 치는걸 보면 문득 순종의 일이 연상돼서 혼자 가슴이 쓰라려진다.
아마 우리 나라에서「샴페인」잔을 이렇게 부끄럽고 쓰라리게 받은 이는 순종이 그 처음이오 마지막일 것 같다.
창덕궁 동행 각은 황제의 사교 실이오, 또 오락실이라서「빌리어드·룸」으로도 쓰이게되니 황제는 무료한 나날을 여기서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동행 각은 창덕궁구경을 들어가면 누구나 볼 수 있으니 나라를 빼앗기고 주인이 종으로 떨어져 종문 서를 받고 나서 축배를 내던진 자리를 살펴보면 무언가 뭉클! 가슴에 느끼는 바가 있을 성싶다.
「샴페인」은 기쁠 때, 흥겨울 때「카페」에서 펑펑 터뜨리는 줄로만 알아서는 무언가 잊은 것이 있는 것 같아서 한스럽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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