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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7)<제25화>카페시절(9)|이서구(제자는 필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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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밀려드는 양풍>
「카페」라는 데서는 레코드 음악보다는 미희들의 육성이 인기였다. 주객과 어울려 합창이 나오면 일대 장관이었다. 좌석이 공개되어 있어서 모든 것이 드러나는 곳이라서 어느 좌석에서든지 노래가 시작되면 홀 전체가 떠나갈 듯 일대 합창이 벌어진다. 흥이 나서 노래를 부르는 틈에 손님이 시키지 않은 술병이 연속 들어오고 계산서를 받고 나서야 『잘못 걸렸구나』 울상을 하는 사례는 지금이나 일반이지만 한가지 요사이와 다른 것은 손님보다는 여급들이 더욱 어수룩했다는 점이다.
그 시설 카페에서 이름을 날리던 여급 중에는 진정을 다해 사랑을 하고 그 남자를 따라 가정으로 들어가 오늘까지 의젓하게 사는 이가 한두 사람이 아닌 것이다.
구태여 이름을 밝힐 것은 없지만 필자의 친구 중에도 카페출신 부인과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이가 한둘이 아니다.
남촌·북촌에 카페와 바가 흥청거릴 무렵 또 한가지 새바람이 불어왔으니 그것이 곧 양악과 양춤이다. 방아타령이니 사발가이니 장구소리만 요란하고 흥이 나면 어깨바람을 일으키며 우리 춤만 추던 젊은이들이 차츰 개화바람에 새 정신이 났던지 양곡에 양춤을 추기에 이른 것이다.
양춤에 눈을 뜬것은 물론 서양에 다녀온 멋쟁이들이 첫 선을 보인 것이 그 꼬투리가 된 것이지만 내 것을 좋아하는 젊은이들이 양춤에 당긴 것은 순리이다. 서울에서 양춤이 공개된 자리에서 벌어진 것은 이제는 헐리고 다시 세워졌지만 조선호텔이 문을 열고 외국인의 출입이 잦아지니 서울에 주재하는 각국 영사들이 크리스머스 축하 댄스·파티를 열면서부터 그 멋진 놀음놀이에 관심이 기울어졌다고 본다. 남녀가 서로 안고 다정하게 맴을 돌지만 어디까지나 예절에 어긋남이 없이 의젓하다.
『야…그 서양식 사교춤이라는 것 멋지더라. 우리도 한번 그렇게 놀자』 소리가 터져 나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서울에서 제일 먼저 사교춤이 등장한 곳도 물론 카페였으나 춤을 출줄 몰라서 안타까왔다. 남들은 아가씨를 끼고 꿈이나 꾸듯이 빙빙 잘도 도는데 춤을 출 줄 모르니 울화만 터진다.
『자! 어디 가서 춤을 배워야 되겠는데….』
걱정이 태산같다. 이때 마침 등장한 이가 이갑령이라는 청년이다. 상해에서 갓 돌아왔다는 젊은 멋쟁이, 몸에 맞는 양복맵시도 산뜻하거니와 인물도 해맑고 춤 솜씨는 더욱 묘했다.
이갑령의 인기는 그야말로 대단했다. 어느 카페에 가던지 대환영이다.
『이상! 나 춤좀….』
팔을 벌리고 안겨드는 여급들의 아양떠는 모습은 춤을 한번 잘 추어보고 싶으나 춤을 못 춰 고민하는 주객에게는 눈꼴사나운 모습이었다.
이갑령은 밤낮없이 춤을 배우려는 여인들에게 둘러싸여 정신을 못 차렸다.
그렇다고 이갑령은 이른바 부랑자도 아니오, 건달패도 아니다. 제법 똑똑한 청년이었으나 자기가 일으킨 춤바람에 자기가 골탕을 먹은 셈이었다. 그는 기어이 강흥선이라는 기생과 정분이 나서 상해로 도망을 갔으니 말이다.
북촌에서 이갑령이 춤바람을 일으킬 무렵 남촌(일본인 지주지)에서는 요성과 같이 한 일본여인이 등장했으니 그가 바로 미국인 조지·앨런이라는 상인의 양첩이었다. 그래서 미시즈·앨런이라 불렸지만 이 아가씨가 대단했다. 「앨런」이라는 미국인은 그때 우리 나라에 파라마운트 영화를 배급하는 일을 맡아서 서울에 주재하게되자 영악정(현 중구 용자동)언덕 밑 영희전 자리에 집을 정하고 호화스러운 살림을 했다. 그 「미시즈·앨런」이 춤에 미친 아가씨라서 집에다가 자동 피아노를 놓고 춤출 상대를 찾고 있었다. 이때 제일착으로 걸려든 사나이가 단성사 주임변사로 이름을 날리던 김덕경이었다.
김군은 단성사에서 상영되는 파라마운트 영화의 대본을 구해 읽으려고 드나들다가 일녀와 알게되었고 춤 상대자로 뽑힌 것이다. 두 사람의 관계야 어쨌든 김덕경이 드나들며부터 어여쁘고 춤 잘 추는 서양인의 첩은 허다한 사나이들을 청하여 밤낮없이 춤과 술로써 이국에서의 서글픔을 달랬다.
남편이라는 조지군은 항상 일본·미국으로 나돌아 집에 없었으니 춤을 즐기고 술을 마시며 심심지 않은 나날이 지나갔다고 필자도 춤을 배운 실없은 사나이의 하나이지만 서울의 개화바람은 카페와 바가 생기고 사교춤이 등장하면서부터 그 절정에 이르렀다. <계속>(제자는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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