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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소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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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이 빈궁한 시대에 인간은 어떻게 자신의 삶을 인간의 삶답게 이끌어 나갈 수 있을까? 그러한 문제에 대하여 박태순씨의 『무비부』(월간문학)과 황석영씨의 『아우를 위하여』(신동아)는 제 나름대로의 성실한 대답을 하고 있다. 아마도 작가의 기질 탓이겠지만, 박씨는 부정의 정신에 의해서, 황씨는 긍정의 정신에 의해서 이 빈궁한 시대를 버티어나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박씨의 『무비부』은 극도의 압축과 절제에 의해 한 인물의 전모를 드러내는 유교식 전기체를 빌어 이 세계의 혼란을 극복하려한 한 인물을 보여주고 있다. 그 인물의 세계관은 철저한 부정에 입각해서 세계를 산다는 것이다. 그 부정에 의해 긍정해야할 부분이 드러나는 것이며, 그 긍정해야할 부분을 키움으로써 절대적인 부정이 성립된다는 방법론적 부정을 그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황씨의 『아우를 위하여』는 감정의 직접적 토로가 문학적으로 승화될 수 있는 편지체를 사용하여 인간의 인간됨을 위협하는 폭력에 대항하여 살아가는 방법론을 보여준다.
그 방법론은 인간은 다 연결되어 있으며, 폭력에는 무섭다는 느낌으로만 굴복하지 말고 그것의 의미를 알고 그것을 극복하려고 애를 써야한다는 긍정적 방법론이다. 박씨가 지극히 고전적인 문체로 단아하게 표출하고 있는 부정적 세계관이나 황씨가 격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긍정적 세계관이냐를 막론하고 그것은 둘 다 혼탁하고 무질서하고 지표를 찾을 수 없는 현실을 이겨내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 의지가 고전주의적인 절제에 의해 부정적인 표현으로 나타나든지, 낭만주의적인 격정에 의해 긍정적인 표현으로 나타나든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현실이 혼탁하다는 것을 깨닫고 거기에 함몰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기술의 방법론적 반영이라는 측면에서 나에게 깊은 충격을 준 것은 최인호씨의 『전람회의 그림』(월간문학)이다. 『전람회의 그림』은 씨의 전작인 『술꾼』이나 『타인의 방』과는 연결이 되는 일종의 초현실주의 소설이다.
초현실주의 소설이라면 꽤 당황해 할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나로서는 그 어휘를 「네르발」의 몇몇 소설, 그리고 「브르통」의 『나쟈』, 혹은 「아베·고보」의 『모래의 여인』같은 소설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사용한다. 일상적인 것을 가장 비일상적인 왜곡된 표현법을 사용하여 두드러지게 드러내는 초현실주의적 소설은 한국신문학에서 그렇게 괄목하리만큼 큰 성과를 낸 적이 없다. 그러나 『전람회의 그림』은 한국어로는 그러한 기술적 조작이 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은 「망디아르그풍」의 한편의 시와 두 편의 짤막한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시에서는 하나의 꽃을 빌어 작자의 예술관이라고 할 수도 있을 방법론이 펼쳐진다. <내가 그대를 자르고, 그대의 핏속에 이빨을 들이대고 흡혈귀처럼 더운 피를 핥아 혼미한 하늘은 흔들리고, 어두운 계단을 한없이 올라가는 나의 의식 속에서 그대 꽃은 차가운 겨울날 전신주위에 앉아 나를 응시하는 철새의 시위 속을 뚫고 나가는 강한 예감 돌연히 솟아오른다.>
약간 긴 이 인용문 중의 꽃을 현실이라는 말로 바꾸면 이 작자의 예술관을 예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자의 작품 속의 돌연한 실종, 등장, 기상천외한 기복 등은 작가자신의 「강한 예감」을 뚫고 날으는 그의 현실인데, 그 현실 속에서 독자들은 작자 자신이 애를 써서 숨기려고 하는 것들을 알아보게 된다.
첫 번째 「에피소드」인 「아내 이야기」는 매력을 잃어버린 동반자에 대한 권태감과 자신의 무기력함을 그래도 참고 버티어 나가는 동반자에게서 발견하는 자신에 대한 연민이 아내의 상실과 귀환이라는 「플로트」 속에 숨겨져 있으며, 두 번째 「에피소드」인 「추운 여름날」에는 무의미한 인간관계와 그것이 주는 권태감이 허장성세 투성이의 사건 속에 처참하게 그려져 있다.
초현실주의 소설의 일반적 성향인 사랑과 문명비판이 매우 축소되어 한국적인 정황 속에서 으스러져있다 하더라도, 새로운 기술방법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기념할만한 작품이다. 예술가가 혼탁한 현실에 질서를 부여하여 그 혼돈의 영역을 줄이는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더욱 그렇다.
위의 세 작품 외에도 읽을만한 작품은 많다. 소시민의 애환을 따스한 눈으로 들여다본 이호철씨의 『여벌집』(월간중앙), 이민문제를 범박하게 개인적인 차원에서 비판하고 있는 박형용씨의 『딸의 파혼』(월간문학), 무전취식을 하면서도 죄의식을 조금도 느끼지 않는 노인을 다룬 박태순씨의 『걸신』(월간중앙), 막걸리집의 도난사건을 그리고 있는 방영웅씨의 『첫눈』(동), 5·16 이후의 현실을 전통적인 민족주의자의 자살을 통해 비만하고 있는 한문영씨의 『후예』(현대문학) 등이 그렇다.
특히 방씨의 『첫눈』 씨의 출세작 『분례기』 이후의 수확처럼 보인다. 삼류인생의 삵에 대한 의욕이 첫눈에 빗대어 고취되어 있는 이 소설은 전통적인 소설이 갖출 수 있는 것을 하나도 빼지 않고 완벽히 갖추고 있다. [김현<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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