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더 북한 서소문 포럼

북한 핵문제와 '한방 치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2면

안희창
통일문화연구소 전문위원

1980년대 초반 경찰서 출입 기자일 때 선배들로부터 들은 일화다. “홍수가 나면 상류에서 사체(死體)가 떠내려와 한강변 어느 경찰서 관할 구역에 걸리지. 그런데 다음 날 보면 사체가 옆 경찰서 관할구역으로 옮겨져 있어. 공을 세울 수 있는 사건도 아니고 처리하기에 귀찮으니까 서로 핑퐁을 한 거야.” 지금은 그럴 리 없겠지만 당시에는 그런 일이 벌어졌다. 기자도 교통사고 사체를 놓고 핑퐁을 벌인 사건을 취재한 적이 있다. 북한 핵 문제가 발생한 지 20년이 지나도록 해결이 요원해지는 현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든다. 북핵 문제가 ‘사체’이고, 미국과 중국이 사체를 핑퐁하는 관할 경찰서이며, 한국은 사체가 뿜어내는 각종 병균의 위험성에 노출된 지역주민이 아닐까.

 미국과 중국은 그동안 북핵 해결을 위해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여왔다. 94년의 미·북 제네바 합의와 금년 봄 이후 북한에 대한 정치·경제적 압력을 눈에 띄게 강화하고 있는 중국의 태도가 그렇다. 그러나 무려 2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르면서 북핵 사태에는 국제정치상의 미묘한 ‘국익 논리’가 작동되고 있는 것 같다. 북핵 저지가 미국과 중국에 ‘정말로 양보할 수 없는 국익’인지 여부다. 양국은 과거에 ‘그런 국익’이 훼손되면 무력을 행사했다. 중국은 통일베트남이 중·소 국경분쟁에서 소련을 지지하고 베트남 내 화교를 탄압하자 79년 2월 베트남에 대해 무력을 행사했다. 미국도 91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과 2003년 이라크의 핵개발을 빌미로 이라크에 군사 개입했다.

 그동안 미국과 중국이 힘을 합쳤어도 지금과 같은 북핵 사태가 벌어졌을까. 꼭 무력을 쓰지 않더라도 북핵 문제는 큰 틀에서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런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양국도 힘에 부치는 측면이 있었겠지만 그것보다는 ‘다른 사정’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그것은 미·중이 북핵 문제를 동북아에서의 패권 장악 및 남북한 통제를 위한 ‘긴요한 자산’으로 간주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다.

 지난 6월 초 미·중 정상회담 이후 양국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북핵 문제 해결에 나설 것이라는 분석이 유력하게 제기됐다. 그러나 최근의 양상을 보면 그런 분석이 시기상조임을 보여주고 있다. 6자회담 재개를 위해 미국과 북한을 설득 중인 중국의 기본 입장은 미국의 양보다. 미국이 그동안 회담의 전제로 내세웠던 ‘2·29 합의(북한의 핵·미사일 실험 중지 선언,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 중단, 국제원자력기구 감시단 입북)+알파’의 수준을 낮추어 달라는 것이다. 중국이 북한에 일부 경제제재를 가하고는 있으나 북·중 교역은 더 늘고 있다. 미국은 ‘북한의 진정성이 선결 과제’라는 이유로 중국의 양보 요구를 거부하고 있으나 속내는 북핵 문제에 여력이 없는 것이다. 한·미 관계에 정통한 전직 고위 당국자는 “미국의 장관급 이상 중에 북한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결국 북핵 문제 해결에 한국이 나설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북핵 위협에 대비한 군비태세는 ‘조용히’ 강화하면서 창의적인 로드맵을 입안, 미·중·북의 동의를 얻어내는 ‘거간꾼’이 돼야 한다. 우리 내부에서 북핵 문제 해결을 놓고 견해가 갈라지지만 그나마 공통적인 것은 ‘전쟁’과 ‘퍼주기’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외과 수술’이 아닌 ‘한방 치료’ 방식으로 북핵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구체적으론 ‘한국을 통하지 않고는 미국에 올 수 없다’는 점을 북한에 분명히 해달라고 미국을 설득한다. 남측 국민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이 아닌 방식으로 북한을 지원함으로써 남북관계를 개선한다. 이는 중국이 진정 원하는 한반도 정세이니 중국의 다양한 협조를 얻을 공산이 커진다는 이점이 있다. 무엇보다 이런 전략을 정권교체에 관계없이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치 서독이 대(對)동독 강경정책과 포용정책을 각 20년씩 추진했듯이 말이다. ‘북핵’ 하나에만 초점을 맞추어 대응하면 정답이 나오기 어렵다. 하지만 한반도 평화를 유지하면서 시간을 두고 ‘민주화’까지 포함한 중국의 변화를 지켜보면 정답이 나올 수도 있다.

안희창 통일문화연구소 전문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