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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로 공연 못할 땐 밥값에 악기 잡히기 일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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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유낭극단의 비애
OK연구단이니,「빅타」가 극단이니 하는 인원구성이나 재력면에서 안정된 공연단체가 등장하기 이전인 1925년 안팎에는『만주 가서 돈벌이해오마』고 떠나는 이른바「유랑극단」이란 흥행단체가 많이 떠돌았다.
「매스컴」이 발달하지 않아서 그때로서는 유명 흥행 단체이던 예림함(타두한) 토월함(박승희)무대 협회(전우경 등) 극우사(하기종) 등도 흥행에서 수지를 맞추기는 꽤 어려웠을 때이니 이름없는 유랑극단의 비애는 알만한 것이었다.
이 무렵의 지방 순회공연은 여름 장마철과 겨울 삼동을 피하는 것이 요령으로 되어있었다.
대부분이 노천 극장이었기 때문에 장마철을 만나면 낭패인 것이었다.유명한『황성옛터』도 전고린이 비때문에 공연을 못하고 여관방에 갇혀있는 동안 작곡한 것이긴 하지만 명곡을 내놓는 경우와 달리 30여 큰 식구가 공연을 못하고 여관에 갇히게 되면 여관밥값에 낭패가 되는 것이었다.
이무렵 유랑극단은 주로 북상을 거치며 북상,상산봉에서 두만강을 건너 개천을 거쳐 간도의 용정으로 가 만주의 신경·봉천·적화 등 남만주일대를 도는「코스」와 신의주에서 안동을 거쳐 가는 것 이 있었다.함경도에서는 해변가 도시에 큰 정어리 창고가, 많이 공연으로 쓰였다. 생선비린내가 나기는 했지만 노천극장보다는 훨씬 좋았다.
이 유랑극단 가운데는 무성영화를 한편쯤 곁들이는「팀」도 있었으나 이들의 색깔은 정말 정처 없는 것이었고 비참한 것이었다.흥행성적이 좋지않든가 장마때문에 공연을 못하면 여관밥값이 밀려 악기 등을 여관에 잡히는 일이 흔했다.
처음에는 여러 개 있는 악기 등에서 1,2개를 말지만 때로는 악기저당이 계속되어 마침내는 반주에 지장이 있을 만큼 줄었다가 나중에는 나팔1개와「기타」1개가 남는 정도까지 사정이 딱하게 되고 가수들에게 준 다던 돈을 주기는 커녕,만주 등 먼 타국 땅에서 무일푼으로 해산하는 슬픈 운명에 빠지는 것이었다. 여기에 끼었던 가수들은 거지꼴로 들아오는 것이었다. 이것을 노래한 것이 일년설의『유랑극장』이었다.
그러나 이 무명「유랑극단」의 사연과는 달리 초기 가수들에 대한 사회나 연예 단체의 대접은 융숭한 것이었다.
1926년에 경성방송국이 생기면서 노래가 전파를 타자 여기 나가는 가수들은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지금처럼 전화가 흔하지 않아 방송 몇 시간 전에 알리는 것이 아니고 2,3일전에 미리 알려주는데 대개 엽서가 오는 것이다.『몇 월 며칠 몇 시 귀하를 모시고자 합니다』하는 사연이다.
기다리고 있으면 당시 서울 방송국에 있던 2대의 차중에서 1대가 오는 것 이었고 운전사가 내려서 문을 열어주기 까지 했다.방송국에 들어서면 기다리는 동안 차 한간을「서비스」하고 방송이 끝나고「스튜디오」를 나올 때면 또 차 한잔 권하면서 은 쟁반에 받쳐서 방송사례금을 주고 집까지 데려다 주는 것이었다.명창이나 인기가수는 1회 출연에 있고 독창은 5월,둘학창은 8원,3인은 5원,4인은 3원,5인 이상은 15원 균일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보다는 만주로 공연을 나가 타국 땅에서 동무들을 만났을 때 가슴이 뭉클하는 향수·비애등에서 잊을 수 없는 노래가 나오는 것이었다.
이시우작곡 『눈물 젖은 두만강』이 이것이다.『두만강 푸른물에 노 젖는 뱃사공,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심고, 떠나간 그 배는 어디로 갔소, 그리운 내 님 이여 그리운 내님이여』란 가사인데 이것은 작곡가 이시우가 1935년께 만주의 통화에서 여관에 들었는데 옆방의 손님을 만나 이야기하다가 그가 독립투사의 미망인 인 것, 그리고 미망인이 된 사연을 듣고 지은 것이었다.
미망인은 10년 전 여름날밤,독립 운동을 하던 남편이 왜경에게 좇기는 바람에 같이 두만강을 건너 탈출하다가 남편은 발을 잘못 디뎌 익사했으며 시체도 못 찾았다고 옛 이야기를 해 준 것이었다.
이시우는 이 슬픈 사연을 가사 없이 곡으로 오선지에 그려 가지고 귀국,10년께 OK연주단이 후신인 조선악극단의 문예부에 있던 김용호에게 이 사연을 말해주고 가사를 의뢰했던 것이며 김정구가 불러 감정을 살린 것이다.
이시우는 이밖에 『국경의 부두』둥 수 곡을 작곡하여 양으로 다른 작곡가에게 뒤졌으나 가슴이 뭉클하고 현실을 소재로 작곡한 것이었다. 노래에서의「님」은 잃어버린 나라이고,잃어버린 남편이었다.
이 가락은 KBS「프로」후임 삿갓 북한방랑기의「시그널·뮤직」으로 북한동포에게 보내지고 있는데 이 노래에 이 같은 국경단화가 깃들여 있음을 되새김 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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