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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 천하제일 제주 흑돼지로 순대 빚었으니 …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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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8호 22면

1 이호태우 해변에서의 순대

처음 제주도에 간 건 결혼 후였다. 이미 몇 차례의 유럽 여행, 아프리카 여행을 다녀온 후였으니 꽤 늦게 간 편이었다. 딱히 제주도에 흥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외려 가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럼에도 서른 이후에야 그 신비로운 바다와 온통 검은색인 돌을 직접 만나게 된 것은, 몇 번이고 출장이 잡혔다가 어그러졌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조만간 내 돈 들이지 않고 가게 될 텐데 뭐’라는 마음으로 미적거리다, 일 때문에 제주도에서 반년 동안 생활한 적이 있는 아내의 안내(?)를 받으며 제주도로 향하게 됐던 것이다.

정환정의 남녘 먹거리 <5> 제주 오일장

물론 제주도는 좋았다. 내가 다녔던 어떤 여행지보다 아름다운 곳이 많았으며 내가 경험했던 어떤 여행보다 여유롭기도 했다. 무엇보다 할머니들의 제주도 사투리가 좋았다. 제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협재로 향하던 중 앞자리 할머니들끼리 나누시던 대화 덕분에 나는 제주도에 온 게 더없이 행복했다. 그분들이 나누던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어휘들로 이루어진 이야기들은 내가 아주 낯선 곳에 와 있다는 사실을 인지시켜주는 명료하고 산뜻한 증거였다.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뒷자리에서 들으며 신기하고 재미있다는 생각에 나는 혼자 웃음을 참느라 무진 애를 써야만 했다.

그런데 통영에 내려와 살기 시작하면서 제주도에 대한 인상이 조금 바뀌었다. 어디를 가든 바다와 접해 있다는 사실 때문은 아니다. 통영은 섬이 많아 파도를 볼 수 없는 반면 제주도에서는 어디에서든 박력 넘치게 부서지는 흰 포말을 만날 수 있으니, 짠물이라는 공통점만 제외하면 통영과 제주도의 바다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차이 때문인지, 시장에서 만나게 되는 해산물도 꽤 다르다. 좀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해산물이라면 통영 쪽이 훨씬 다양하다.

2 동문시장보다 큰 시장이라며 자랑에 여념이 없던 순대집 아주머니 3 순대뿐 아니라 각종 부속도 다양하다 4 할머니가 직접 재배하고 채취한 냉이와 고추

나를 제주로 부르는 건 흑돼지
처음 제주의 동문 시장을 방문했을 때만 해도 찬란한 은빛으로 빛나던 갈치에, 위풍당당한 고등어에, 아기의 연분홍빛 볼만큼이나 고운 빛의 옥돔에 넋이 나가기도 했다. 그래서 절로 “맛있겠다!”는 감탄사가 한숨처럼 나오기도 했다. 그런데 통영에 살다 보니 그런 것들에 영 감흥이 없어졌다. 물론 제주도 갈치와 고등어의 ‘때깔’이 좋은 것이야 주지의 사실. 하지만 통영에는 철에 따라 변화하는 제철 생선들이 부지기수다. 게다가 옥돔 역시 통영에서도 말리지 않은 생물로 얼마든 만날 수 있으니 그것들의 희소성이 대폭 줄어든 탓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변치 않는 가치를 자랑하는, 그래서 내가 제주도에 갈 수밖에 없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으니, 바로 흑돼지다.

사실 나는 해산물보다 육류를 더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맛있는 돼지고기와 마주하게 되면 절로 마음의 평온을 찾게 된다. 그래서 여러 곳을 여행할 때마다 이런저런 돼지고기 요리들을 많이도 찾아 먹었다. 그리고 제주도 흑돼지는 그렇게 경험한 각국의 돼지고기들 중 첫손에 꼽아도 전혀 민망하지 않을 만큼 맛있었다. 아기가 태어난 후 첫 제주 여행 일정이 잡혔을 때도 가장 먼저 떠오른 건 고기 국수를 비롯한 각종 돼지고기 요리였다.

하지만 막상 제주도에 도착하고 보니 계획을 많이 수정해야 했다. 갓 200일이 되는 아기를 데리고 갈 수 있는 곳은 그리 많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연탄이나 숯으로 고기를 굽는 곳은 더더욱 갈 수가 없었다. 이곳저곳 찾아보던 중 제주시에 동문시장 말고도 큰 시장이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됐다. 오일장이었다. 거기서는 직접 만든 순대도 팔고 있을 뿐 아니라 내게 제주 여행의 즐거움을 알려준 할머니들만 장사를 하고 있는 ‘할머니 장터’가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마침 여행 기간 중에는 장날이 포함되어 있었다. 고민할 이유가 사라졌으니 가는 일만 남은 셈이었다.

제주 짠바람에 순대맛 업그레이드
제주시 오일장은 예상보다 규모가 컸다. 구역별로 판매하는 상품이 다른 것도 이색적이었지만, 가장 큰 관심이 갔던 곳은 아무래도 ‘할머니 장터’일 수밖에 없었다. 안내도를 보고 어렵지 않게 찾아간 곳에는 정말 할머니들만 계셨는데, 내놓고 팔고 있는 것들은 대부분 직접 채취하거나 기른 것들이었다. 콩, 고추, 고구마순, 고사리 같은 것에 간혹 버섯과 이름을 알 수 없는 빨간 열매도 보였다. 그런 것들의 내력이 궁금해 질문을 해봐도 돌아오는 대답의 절반 이상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던 터라 나와 아내는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그 할머니들로부터 시래기와 고사리, 땅콩 등을 샀다. 모두 곱게 포장된 것들은 아니었지만 깨끗하고 정성이 깃들어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순대. 원래 순대로 유명한 곳은 따로 있다고 하지만 시장에서 사 먹는 순대는 그 맛이 각별한 법이다. 특히 어렸을 때 어머니를 따라 시장에 가서 얻어먹던 순대 한 그릇에 대한 추억이 여전한 터라 그 북적이는 공간에서의 순대가 그리웠다. 그러니 시장 한가운데서 모락모락 김을 내뿜고 있는 순대들을 보자 반갑기 이를 데가 없었다.

“전부 제주 돼지 내장으로 만든 것들이에요. 속도 우리가 직접 다 채워 넣은 것들이고.”

순대를 썰어주는 아주머니는, 다행히 사투리가 심하지 않았기에 원활한(?)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순대도 맛있고 다른 부속들도 맛있어요. 제주에서 키우는 돼지들은 다들 깨끗하니까.”

쉴 새 없이 칼을 놀리면서도 순대와 제주 돼지 자랑에 여념이 없던 아주머니로부터 5000원짜리 순대 한 봉지를 샀다. 내장을 채우고 있는 재료들은 이것저것 다양했다. 하지만 그 성찬을 시장에서 맛볼 수는 없었다. 아기가 조금씩 보채기 시작했으니 어디든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그래서 찾은 곳이 머지않은 곳에 위치한 이호태우 해수욕장. 그나마도 바닷바람이 불어오던 터라 뒤쪽 해송림 사이에서 포장을 풀고 조금은 식어버린 순대를 먹기 시작했지만, 그 맛이야 식용비닐로 만드는 공장 순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느끼하지 않고 담백하면서도 적당한 기름기가 느껴지는 맛. 거기에 낮은 모래 언덕 너머로 불어오는 짠바람까지 더해지니 굳이 소금이나 막장을 곁들이지 않아도 순대는 그대로 맛이 좋았다. 다만 이제 슬슬 제 부모가 먹는 것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는 아이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한가롭게 무언가를 먹을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괜히 아무것도 넣지 않은 입을 쩝쩝 다시기도 했지만 말이다.

『서울 부부의 남해 밥상』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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