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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베를린에 딸린 동독 안 「고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에곤·바르」 서독국방상은 서독내각의 훈령에 따라 3일 동「베를린」에서 동서독 및 동서 「베를린」간의 왕래문제 등 「베를린」 협정의 세부시행규칙에 관해 동독대표 「미하엘·콜」과 최종협정을 체결할 단계에 이르렀다.
동독영내 1백60㎞ 안의 고도 서 「베를린」에 관한 협정이 지난 9월 4대국에 의해 가조인, 그 세부사항이 동서독협상대표들 사이에서 마무리되고있으나 서「베를린」에 딸린 또 다른 작은 육지의 「고도」들이 서「베를린」밖 동독영내에 12군데나 흩어져있어 양측의 골칫거리가 되어왔다.
이 같은 고도들은 1920년 8개 시, 59개의 지방구역과 기타 농지가 통합, 대 「베를린」시로 책정된 후 그중 일부가 형식적으로는 시관할구역으로 남아있으면서 사실상 시로부터 떨어져나감으로써 생겨났다. 그후 1944년 연합군이 점령지역을 책정할 때 사실상 분리돼버린 이 지역들은 역시 그대로 「베를린」행정구역으로 처리돼 버렸던 것이다.
이 고도들 가운데 가장 말썽이 되고 있는 곳은 서「베를린」 남서쪽 불과 1㎞에 인접한 「슈타인슈튀켄」. 1백90가구가 완전히 동독령에 갇혀 사방 「콘크리트」 망루 위의 동독인민경찰의 감시 속에 살고있다.
이 촌락에 대해 공산측은 대전직후 줄곧 합병을 기도해왔다. 1951년에는 인민경찰이 이 촌락을 점거, 서「베를린」으로 통하는 전홧줄을 끊어버리는가 하면 동독령임을 선포하는 포고문을 게시했다.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자 연합군측은 3명의 헌병으로 구성된 사상최소 규모의 위수군을 편성, 이곳에 주둔시킴으로써 서「베를린」 시민을 안심시키기 위한 상징적인 「제스처」를 취하기도 했다. 「슈타인슈튀켄」 같은 절해의 고도상태와는 달리 「아이슈켈러」는 서「베를린」으로 통하는 도로라도 있으니 다행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름이 도로일 뿐이지 일방통행의 샛길인 까닭에 사람도 다니기 좁은 판이니 전봇대 하나 세울 여유도 없다.
따라서 통틀어 20명의 이곳 주민들은 서「베를린」을 8백m 코앞에 두고도 전기나 「개스」의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 사람의 통행도 길옆 동독령을 한 발짝이라도 「침입」하면 가만 놔두지 않겠다는 인민경찰이 도처에 매복하고 있으니 상주민이 아닌 사람은 이 지역을 담당하고 있는 영국군의 호위가 없으면 얼씬도 못한다. 10년 전 한 국민학교 소년이 서「베를린」시 접경에 정거하는 학교 「버스」를 타기 위해 자전거로 샛길을 통행할 때마다 인민경찰이 으름장을 놓는 바람에 그는 등교를 포기한 일까지도 있었다(결국 영국군 무장「지프」가 매일 이 소년의 자전거 앞뒤를 호위해서 문제는 해결됐지만).
시북서쪽 「엘렌그룬트」는 「하벨」 강가의 별장지대. 단 몇시간의 여가를 위해 서「베를린」의 별장주인들은 「베를린」 장벽의 육중한 철제대문의 까만 「플라스틱」 단추를 눌러 인민경찰의 허가를 얻어 저격병의 감시의 눈초리 속에 서독령을 몇 분 걸어가면 또 다른 장벽이 나타나고 이를 지나야만 그들의 집에 닿을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동독도 자신이 쌓아올린 「베를린」 장벽너머 서「베를린」에 몇 군데 작은 고도를 가지고 있는데 최근 「베를린」협정시행세부사항이 3일에 타결될 전망이라는 보도가 있고 보면 「아이슈켈러」의 농부가 전깃불 아래서 서「베를린」 신문을 볼 희망도 까마득 하지만은 않은 듯. <한남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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