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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 주고 약도 안주는 사학행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우리 속담에『병 주고 약 주고…』라는 말이 있거니와, 이것은 뒤집어 말하면 아무리 얌체 짓을 하는 사람도 자기 때문에 생겨난 타인의 병을 고쳐주어야 할 책임만은 면치 못한다는 뜻도 될 것이다. 하물며 정부나 어떤 공공기관들이 그들 자신의 변의와 정책수행을 위해 어떤 특정인이나 특정집단들에 참을 수 없을 만큼 심대한 희생을 강요하면서도 그 결과에 대해서만은 오불관헌한 태도를 취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 문교당국자의 사립학교에 대한 태도를 보면 바로 이러한 오불관헌이 예사처럼 저질러지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하겠다. 교육 공무원법상 공립학교 교원과 똑같은 복무상 의무가 부과되고 있는 사립학교 교사들에 대해서는 공립학교 교원이 받는 신분상 특전이나 연금법상의 혜택이 전혀 제외되고 있는 사실이라든지, 최고도의 자주성이 인정되어야 할 사립학교에 대해서까지 중학교 무시험 진학 제를 일률적으로 상용시켜 그들을 준의무교육기관화 하고서도 이에 필요한 경비 같은 것은 오불관헌의 태도로 일관해 온 정부의 처사는 인간사회의 개인 대 개인 간의 윤리관계로 보아서도 비난을 받아 마땅한 일이라 할 것이다.
최근 인천에서 열린 전국 사립 중 고교 교장연합회 총회에서는 ①사립학교 교직원에 대한 연금법 제정 ②준의무교육기관화한 사립 중학교에 대해 국고보조를 할 수 있도록 지방교육 재정 교부금법상 명문삽입 ③사립 고등학교의 자율적 운영체제 인정 ④사립 중·고 교장의 일률적 분리 지시를 철회할 것 등을 결의하고, 정부 및 국회의 적절한 배려를 촉구한 바 있다. 사립 중·고교 당국자의 이 같은 요구는 실상 지난 8월28일에 소집됐던 전국 사립중등학교장 긴급총회의 결의를 재확인한 것으로, 이는 때마침 각종 세법개정안과 새해 예산안을 심의 중에 있는 국회를 염두에 두고 그들의 특별한 주의를 환기코자 하려는데 주목적이 있는 것으로 짐작한다.
그러나 사립 중·고교 당국자의 이 같은 주장은 기실 소리를 크게 하면서 외치고 있는 요구라기 보다는, 지난 수년간의 막심한 곤란을 겪은 끝에 마침내 재정적인 파산상태에 이른 사학 당국자들이 기진맥진, 배수진을 치는 듯한 비장한 각오로 당국의 선처를 읍소하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음을 깊이 통찰할 필요가 있다.
70년 말 현재 우리 나라의 전체 중·고등학교 2천 5백 97개교 중 45%, 그리고 전체 학생 수 1백 90여만명 중의 51%가 사립학교요, 또 거기에 재학하는 학생임을 상기할 때, 그들이 이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재정적 위기에 봉착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나라 교육체제 전체의 위기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시 한 나라의 교육체계 중 그 절반 이상의 판도를 차지하고 있는 교육기관에 대해서 정부가 국고보조 한푼 주는 일없이 오불관헌 하면서 갖가지 번잡한 지시와 명령 등 관권통제만을 수십년 동안이나 일삼아 왔다는 사실 자체가 상식을 벗어난 일인 것이다.
하물며 모든 사립중학을 준의무교육기관화하도록 강요하면서 공납금은 도리어 공립학교 수준으로 내리게 하고 그 반면 학교 평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호령을 일삼는 것은 교육적 견지를 떠나서라도 심히 불공평한 행정작풍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국공립학교가 수업료 및 입학금 수입과 신영비 시설비 등을 충당하기 위한 많은 국고보조로써 비교적 여유 있는 재정「소스」를 가지고서도 만족할 만한 학교경영비를 얻지 못하고 있다면, 사실상 동액의 수업료 및 입학금 수입밖에는 아무런 고정된 세입재원이 없는 사립 중등학교에 대해서 평준화된 교육을 실시하라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한 요구일 것이다.
국회 및 정부는 지금까지와 같은『병 주고도 약도 주지 않는 비리』를 단연 정지하기 위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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