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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의 날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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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대영 박물관에 가면 3천년 전 「이집트」의 어느 한 부자가 도망간 노예를 잡겠다고 거리에 써다 붙였던 현상부 광고가 전시되어 있다. 아마 이런 게 광고의 시작이 아닌가 여겨지고 있다.
대학이 학생모집광고를 낸 시초는 또「이탈리아」의「파두아」대학이 처음이다. 그 광고문을 보면 『가장 자유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마음놓고 진리를 탐구할 수 있다』는 귀절이 들어있다.
「파두아」대학은 세계에서 제일 먼저 생겨난 대학이다. 따라서 학생운동의 시작도 이 대학에서부터였다고 볼 수 있다.
이때의 학생운동은 물론 하숙값과 음식값을 올려 받으려는 마을사람들과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교권이나 정권과는 별 마찰이 없었다.
왜냐하면 학칙까지도 학생들이 만들어 낼만큼 자치권이 확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파두아」대학의 학칙을 보면 흥미로운 대목들이 많다. 『…교수는 시작 종소리와 함께 강의를 시작하고 끝 종이 나자마자 나가야 한다.…교수는 한 학년 내에 소정의 과정을 완전히 다 가르쳐야 만다.…만약에 교수가 휴가를 얻어 학교를 떠날 때는 그가 돌아올 것을 보증하기 위하여 반드시 소정의 보증금을 예치시켜야한다…』 는 등.
마치 교수는 학생들의 종 같은 인상을 풍긴다. 그러나 그 당시 학생과 교수사이에 어떤 대립·마찰이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대학은 학생을 위해 있다는 인식이 처음부터 뚜렷했기 때문이다.
학생과 교수에게 병역·세금면제 등의 특권 부여하고, 이들의 탈선과 방종을 당시의 절대왕권이나 교수들이 묵인했던 것도 대학의 사명, 대학의 자유의 중요성을 체감했기 때문이다.
물론 대학에 따라 자치권의 범위는 달랐다. 가령「파리」대학에서는 학칙은 물론, 「커리큘럼」의 작성도 교수들이 했던 것이다.
그것은「파리」대학이 신학교이며, 또 학생들의 평균연령도「파두아」대학에 비해 월등하게 낮았다는데도 까닭이 있었다.
중세기에 가장 흥청거리던 대학도 「파두아」대학이었다. 자유를 구가한 광고의 효과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14세기에 이르면서「파리」대학·「프라하」대학, 「옥스퍼드」대학들이 더 유명해졌다. 역시 자유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교권이었던 것이다.
만일에 교사의 크기, 장학금 등을 제일 먼저 내세우는 우리네 대학의 학생모집광고를 먼 훗날 누가 본다면 무엇을 생각하게 될까? 「학생의 날」에 새삼 느껴지는 단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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