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실대학의 창립>
평양이 예로부터 산자 수명하고 풍광이 명미하며 절세의 미인들이 많아 색향이라고도 불리는 것은 모두 아는 사실이지만 이 밖에 산업도시·종교도시·교육도시로도 전통을 지닌 곳이었다.
원사유·「아펜셀러」가 서울에서 한창 활약하던 때인 1889년 4월 「새뮤얼·A·모펫」(한국명·마포삼열)가 한국선교사로 임명되어 1890년1월 서울에 들어왔다.
「모펫」은 북한선교의 중심지를 택하기 위해 각 지를 순회하면서 답사한 결과 1892년에 미국선교회의 승인을 얻어 평양을 선교 중심지로 결정했다.
평양에 자리를 잡은 「모펫」은 선교사업과 아울러 교육기관 설립의 필요를 느끼고 적당한 인물을 보내달라고 선교본부에 요청, 1897년 교육자인 「W·M·베어드」(한국명·배위량)가 평양으로 왔다.
배위량은 곧 숭실중학교를 설립하고 1905년 대학부를 병설했으니 이것이 숭실대학의 전신이다.
이미 선교의 목적달성을 위해 고등교육기관의 설립 필요성을 깨달은 선교사들은 1906년 북장로교 선교부, 남장로교 선교부, 「오스트레일리아」 교회 선교부 및 「캐나다」 연합교회부에 속하는 선교사들이 모여 숭실대학을 네 선교부의 합동사업으로 경영할 것을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숭실대학의 영어 명칭이 「Union Christian College」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 나온 것이다.
숭실중학교가 처음 개교할 때에는 배위량 사저에서 개강했으나 1901년 신양리에 새 교사를 지어 옮겼고 대학부 교사는 중학부와 같이 쓰다가 교실부족을 느끼게 되어 1911년 한양 절충식 3층 건물을 지었다. 이 집은 벽돌집이나 지붕은 한식이었다.
1912년 조선총독부로부터 대학인가를 받았는데 대학 명칭을 쓰기로는 우리 나라에서 효시가 되었다.
배위량은 오랫동안 한국인들과 접촉해본 결과 대개가 건실치 못하고 실력조차 없음을 발견했다한다.
그는 한국민을 교육하는데는 학교교육을 통해 가장 진실하고도 실력 있는 인물을 양성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느꼈다는 것이다.
배위량은 한문 교사였던 박자동을 불러 한국 교육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설명한 다음 이 이념을 나타낼 수 있는 학교이름의 작성을 부탁했다한다.
당시 외국인들의 대 한인관이 별로 좋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겠는데 박자동이 지은 이름이 「숭실」이었다.
대학부의 제1회 졸업생은 단 두 명 뿐으로 그중 변인서 목사는 월남하지 못해 소식을 알 길이 없고 항일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김두화는 4년 전 고인이 되었다.
당시 숭실대학의 가장 큰 특색은 학자자급의 제도였다.
학교당국은 가난한 학생들을 돕는 방법으로 장학금이나 무료급여제도 대신에 학생들이 자기 힘으로 노력하여 학비를 조달할 수 있는 자력자급의 기관을 세웠다.
이 기관은 여자전도회의 회장인 「안나·데이비스」 부인이 선교사업을 돕기 위해 자비로 세운 기관으로 처음에는 기계창이라고 불리다가 나중엔 「안나·데이비스」 공업부란 간판을 걸었다.
학교 서쪽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이 기관 안에는 목공부·철공부·활판부 및 외역부가 있어 외부로부터의 주문에 의해 학생들로 하여금 작업을 하게 했다.
학생은 누구나 하루 4시간씩 노동하고 임금을 받아 기숙사·식사대 및 학비에 충당토록 했다.
이윤을 모두 학생들에게 돌렸기 때문에 일반의 비난을 받지 않았고 오히려 자급자족할 수 있는 정신을 길러준다 해서 칭송을 받았다. 교칙이 매우 엄격하고 부정부패는 조금도 용납치 않았다 한다.
학교의 시업시간은 1년 내내 아침 7시45분이었고, 신교회라고 불리던 조회를 매일 20분씩 했다한다.
당시는 일인 형사들이 교내에 무상 출입하면서 정세탐정을 하던 때인데 숭실대학을 출입하던 형사 「나까무라」(중촌)는 『배 목사는 하느님을 대한 듯이 무서우며, 조게 선생(1905년 취임)에게는 열 마디 말을 준비하고 가도 한 마디 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어 근엄한 교풍을 짐작할 수 있겠다.
졸업식을 전후해서는 1주간에 걸친 축하행사가 거행됐는데 축하행사는 졸업축하 예비회, 졸업생 반일회, 졸업생 축하음악회, 졸업생 신구동창회, 졸업생 전별희(연극회), 정식 졸업식, 졸업생 고별회(교장 사택) 등이었다.
각 교파가 연합해서 세운 탓으로 졸업식장도 장로교와 감리교 두 교회당을 교대로 사용, 금년에 장로교회의 동대현 교회당에서 거행하면 다음에는 감리교회의 남산현 교회당에서 거행했다.
졸업식장은 만국기 등으로 아름답게 장식을 하며 교회당 들어가는 경문에는 솔문을 세워 졸업축하의 간판을 달아 환영과 축하의 뜻을 표하였다.
마치 성탄절 준비를 연상케 했다.
마침 지난 10일이 「숭실」의 개교 74주년이 되는 날이라 숭실중학교를 졸업한 필자로서는 이 글을 쓰면서 더욱 감회가 깊다. <계속><제자는 필자>제자는>계속>숭실대학의>
(277)<제20화>전문학교(5)-김효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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