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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제19화)<형정 반세기>(13)권영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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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좌익 죄수들 난동>
8·15의 감격은 쓰라렸던 일제의 쇠사슬에서 풀려 나온 기쁨과 주권을 다시 찾아 독립한다는 기쁨이 겹쳐진 것이었다.
당시의 어느 누구도 해방, 즉 독립이라는 등식을 의심치 않았을 줄 믿는다.
그러나 난데없이 날아든 「한국에 대한 5년간의 신탁통치」소식은 환희와 감격에 부풀어 있던 온 겨례의 가슴에 노여움의 불을 질러 놓았다고 생각된다.
가뜩이나 어수선했던 사회는 신탁통치를 둘러싼 좌·우익간의 갈등으로 더 한층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감겼다는 게 당시 사회상을 표현할 가장 적절한 말일 것 같다.
각종 「테러」가 잇달아 45년12월3일 민족진영의 거두이며 한국민주당 수석총무였던 고하 송진우씨가 암살 당하는 것을 비롯해 근민당 당수 몽양 여운형씨(47년7월19일), 설산 장덕수씨(47년12월2일), 백범 김구씨(49년6월26일)가 피살되는 등 혼란을 빚었고 전국 형무소는 마치 「테러」분자 및 좌익분자들의 수용소처럼 되었었다.
내 기억으로 이 혼란은 후년 5월 남한일대의 경제질서를 혼란에 빠뜨렸던 정판 사위폐 사건이 적발되고, 연루자 60명이 수감됐을 때 절정에 달했었다고 생각된다.
당시 조선경찰 제1관구 청장 장택상이 사건전모를 발표하자 공산당을 비롯, 좌익계열에서는 경찰음모에 의한 조작극이라고 주장, 장안 각 곳에 「비라」를 뿌리고 벽보를 붙이는 등 온갖 행패를 다 부렸었다. 감방 안에서는 집단단식을 벌이는가하면 거의 매일처럼 만세소리가 끊이지 않았었다. 일부 간수들을 매수해 탈옥을 계획하다가 발각된 일도 한 두번 있었다.
이들은 감방 안의 난방 「파이프」를 두들겨 암호로 서로 연락을 취하는가 하면 담당간수들을 어떻게나 협박했던지 직원들이 『못해먹겠다』는 호소를 해오기도 했다.
주모자급인 이관술(조선공산당 총무부장 겸 재정부장)과 권오직(동 중앙집행위원 겸 해방일보사장)은 처음 감방에 들어와서 어찌나 오만했는지, 마치 자기 사무실에서 감방 안의 일당을 지휘한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었다. 공산분자들은 1차로 이들의 탈옥계획이 실패하자 그해 7월29일 열린 첫 공판 때 소동을 벌여 방해공작을 폈었다.
서울지법 4호 법정에서 열린 이들에 대한 재판은 양원일 판사 심리로 조재천·김홍섭 검사가 입회했는데 새벽부터 몰려든 1천여명의 공산분자들이 소동을 벌여 공판을 방해했었다.
난동자들은 장택상이 지휘하는 경찰과 충돌, 서로 충격 전까지 벌여 양쪽에서 여러 명의 부상자가 났었고 조병옥 경무부장이 지원경찰을 지휘해 주모자 손영국 등 50명을 검거함으로써 수습됐다.
이 소동으로 2시간 늦게 열린 첫 공판에서 박낙종(정판사 사장)은 재판장에게『「피고인」들끼리 회의를 열어야겠으나 30분 동안 시간을 달라』고 요구, 거절당하자 변호인단이 재판기피신청을 내기도 했었으니 당시 공판진행이 어떠했나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줄 믿는다.
이들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들어봤던 자칭 국군준비대위원장이라는 이혁은 담당간수들에게는 온갖 욕설을 다하면서도『민주국가의 간수들이 죄인이라고 경어를 안 쓴다』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곤 해 유명했었다. 그는 감방 안이 어둡다고 투정하며 틈만 있으면 형무소 간부들에게 면회를 신청, 별일도 없이 사무실에서 시간을 보내려 해 애를 먹였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 형무소에는 좌익수들의 협박에 못 이겨 또는 매수되어 그들의 편의를 보아준 간수들 또한 적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형무소 안팎에는 그들의「프락치」가 있어 움직임이 일일이 공산당에 보고된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다.
당시 서대문형무소 부 소장이었던 김재원씨의 말을 들으면 47년 봄 어느 날 저녁 서대문형무소에서 좌익수들의 공산당만세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그날 저녁 김씨는 형무소 길 건너편 현저동 관사에서 저녁을 먹는 순간, 형무소 쪽에서「××××국 만세」 소리가 터져 나왔다고 한다. 놀란 김씨가 달려 나가보니 형무소 안팎을 가리지 않고 만세소리가 크게 번지고 있었다.
엄중히 조사해 보니 당시 서대문 형무소 계호 과장 유모가 다른 간부들이 퇴근한 뒤 간부급 좌익수들을 자기 방으로 불러들여 수군대더니 이 사건이 터졌다고 했다.
김씨의 동기생이었던 유모는 당국의 조사를 받기 위해 끌려갔고 이를 계기로 해서 감방안 좌익수들에게 쭉지 등을 전달한 간수 3, 4명도 적발됐었다.
이러한 소동은 정도의 차이는 있었으나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있었고, 유감스럽게도 그때마다 이에 관련되어 파면되는 간수들이 여러 명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공산분자들의 감방안 소란은 당시 우익청년단의 김두한 등이 수감되었을 때 어느 정도 수그러졌었다.
김두한은 그때 형무소를 제집 드나들다시피 했었는데 말썽소식을 듣자 간수들에게 자신에게 수습을 맡겨달라고 했었다고 한다. 김두한 일행은 말썽이 잦은 감방 등에 분산 수용되자 주먹으로 감방을 휘어잡아 소동을 멈추었었다고 생각된다. 요즘도 간흑 김두한 등이 당시 감방 안에서 좌익수들을 마구 때려 죽였다는 말을 듣곤 하지만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밝혀둔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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