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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울사 이 내 몸은, 뉘와 함께 귀농할꼬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강원도 원주시 귀래면의 복숭아 과수원에서 농부 허광영(오른쪽)씨가 인턴 농부 이효범씨에게 복숭아 따는 법을 가르쳐주고 있다. [사진 농촌진흥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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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초 강원도 원주시로 귀농한 이효범(42)씨는 요즘 복숭아 나무 가지를 치랴, 콩과 깨를 수확하랴 무척 바쁘다. 자기 농사는 아니다. 그는 어느 복숭아 농가에 취직한 ‘인턴 농부’다. ‘도시 생활이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해 귀농을 결심한 건 5년 전. 직장을 다니며 귀농 교육기관의 강의를 이수하고, 짬짬이 농촌에 내려가 ‘귀농 선배’들의 일을 거들며 농촌의 실상을 살폈다. 본격적으로 농촌 생활을 시작하게 된 건 올 2월 교사인 아내가 원주시로 발령받은 뒤부터. 그는 ‘일단 농촌 생활을 경험한 뒤에 집과 땅을 사겠다’는 생각에 농촌진흥청의 ‘선도농가 귀농현장실습사업’에 지원했다. 농사 일을 거들며 한 달에 100여만원의 월급을 받고, 농사 노하우도 배울 수 있는 기회다. 그는 “복숭아뿐 아니라 콩이나 벼를 어떻게 농사짓는지 경험 많은 이장님께 꼼꼼하게 배웠다”며 “특히 이장님이 같이 땅을 봐주신 덕분에 콩 심기에 좋은 땅과 집 짓기 좋은 땅을 싸게 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우편 발송 대행업을 하는 양기진(46)씨는 올 6월 지인들과 협동조합을 설립했다. ‘노후를 제주도에서 보내고 싶다’고 꿈꿔온 지 수년 째였다. 주변 지인 10여 명과 얘기를 나누다가 “협동조합을 만들어서 본격적으로 준비하자”는 데 뜻이 맞았다. 알음알음 소개받은 이들이 뜻을 보태며 조합 창립멤버는 47명으로 늘었고, 겨우 6개월이 지났는데 조합원은 100여 명으로 불었다. 벌써 제주 귀농을 꿈꾸는 이들에게 필수 서류 제출을 대행해주는 무료 서비스도 시작했다. 그는 “이미 현지에 정착한 분들도 하나 둘 조합원으로 들어오면서 부동산 시세나 작물 선정법 같은 정보도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정착률 높이려면 일단 취업부터
덮어놓고 땅을 사서 내려오던 귀농 1.0 시대도, 교육 좀 받았다는 자신감에 내려가자마자 농사를 시작했던 귀농 2.0 시대도 이젠 끝났다. 요즘 귀농의 핵심 트렌드는 ‘월급쟁이 농부’다. 기존 농가나 농업법인에 취직해 적으나마 월급도 받고 농업 노하우도 배우면서 현지 정보도 얻는 일거삼득의 전략이다. 아직 직접 내려갈 준비가 되지 않은 이들 사이에선 협동조합도 인기를 끌고 있다.

월급쟁이 농부는 귀농 교육기관에서도 ‘필수 코스’로 꼽을 정도다. 천안연암대 귀농지원센터에선 ‘인턴 등 취업’을 4단계 귀농 준비의 마무리 코스로 꼽는다. 4단계 코스는 인터넷 정보 검색 및 온라인 교육 이수(1단계), 단기간 농촌을 방문해 보는 견학 프로그램(2단계), 귀농 교육기관에서 실시하는 정규 교육(3단계)을 거쳐 마지막으로 귀농 대상 지역의 농가에서 실습을 겸해 농사 일을 거드는 ‘취업’ 코스다.

정부가 나서 귀농인에게 “일단 취업”을 권유하는 건 실패 확률을 줄이기 위해서다. 정확한 정착률 통계는 없지만 농식품부 관계자들은 귀농인 중 10~20%는 3년 안에 농촌 생활을 접고 도시로 돌아가는 것으로 추정한다. 일부 귀농 교육기관에선 “체감적으로 절반 정도는 못 버티고 올라가는 것 같다”는 말도 나온다. 이럴 경우 귀농 때 사들인 땅과 직접 지은 집을 헐값에 팔거나 제대로 처분 못하는 일도 부지기수다. 안종락 농식품부 사무관은 “귀농 실패 사례가 인터넷을 통해 많이 알려지면서 덜컥 땅을 사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귀농인이 많다”며 “월급이 거의 없어도 괜찮으니 일을 거들며 농촌을 배우고 싶다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농촌 취업 기간엔 ▶해당 지역에선 어떤 작물이 잘 되는지 ▶해당 작물이 어떤 땅에서 잘 되는지 ▶누구네 땅이 얼마에 나왔는데 값이 어떤지 등 현지에 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갖가지 정보도 얻을 수 있다. 김부성 농촌진흥청 귀농귀촌종합센터 지도관은 “도시에서 막 내려온 사람들은 농지가 다 똑같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바로 옆 땅이어도 옥수수가 잘 되는 땅이 있고 감자가 잘 되는 땅이 있다. 일단 2∼3년간 땅을 빌려 농사를 지어보다가 동네 사람들의 도움을 얻어 땅을 사야 성공적으로 정착할 확률이 높다”고 조언했다.

문제는 월급쟁이 농부로 취업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마땅치 않다는 것. 농촌에선 상시적으로 일손이 필요한 게 아니라 농번기에만 반짝 일손이 필요하기 때문에 월급쟁이를 고용할 만한 농가나 영농법인이 그리 많지 않다. 게다가 귀농인이 노하우를 얻어 근처에서 농사를 시작하면 결국은 경쟁자가 되는 것이어서 농가 입장에선 무작정 환영할 만한 일도 아니다. 이 때문에 정부 지원사업이 아니고서는 월 100만원을 보장하는 변변한 일자리가 거의 없다. 이영래 한국신지식농업인협회 사무국장은 “농부로 취업할 땐 월급이 얼마인지 따지지 말고 자기가 원하는 분야의 지식을 갖춘 농업인을 찾는 게 먼저”라고 조언한다. 농산물 가공이나 판로 개척에 경험이 많은 농업인으로부터 일을 배우면 단순히 농사만 짓는 게 아니라 부가가치가 높은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어서다. 이영래 사무국장은 “사실 경쟁자로서 기술을 배워가는 입장인 만큼 돈을 내고라도 취업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생각하고 겸손하게 일을 배워야 한다”며 “(귀농인들은) 숙식을 함께 하며 1년쯤 일을 배우면 자신감이 많이 붙는다고들 얘기한다”고 전했다.

협동조합 통해 뭉치는 귀농인들
예비·초보 귀농인들이 협동조합을 통해 정보를 나누는 사례도 늘고 있다. 올 6월 인가를 받은 제주 귀농귀촌협동조합이 대표적이다. 입소문이 나면서 이미 제주도에 정착한 귀농인들이 “도움을 주고 싶다”며 조합원으로 가입할 정도다. 펜션·차량을 공동으로 매입해 제주도에 답사를 가는 조합원들에게 저렴하게 빌려주는가 하면, 귀농 단지를 조성해 집 짓는 비용을 낮추는 구상도 하고 있다.

올 8월 결성된 신안군귀농인협동조합도 예비 귀농인에게 정보 및 체험 기회를 제공한다. 조합의 주된 목적은 귀농 가구가 서로 농사 정보를 나누고 판로를 개척하는 것이다. 예비 귀농인이 연락해 오면 조합원들이 2, 3일씩 숙식을 제공하며 마을을 소개하고 정보를 준다. 은희송(55) 조합 이사장은 “귀농인들은 대개 현지 농민보다 나이가 적고 (농업) 지식이 부족해 농촌에 오자마자 융화되기가 쉽지 않다”며 “귀농인 가운데 조합에서 실질적인 도움도 받지만 외로움을 덜고 생활에 활력을 찾을 수 있어 좋다는 사람도 많다”고 설명했다.

임미진 기자 mi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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