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김종수의 세상탐사] 선의의 역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47호 31면

지난달 23일 서울 구로구에 있는 동반성장위원회에 특이한 방문객들이 찾아왔다. 국산콩 생산자연합회 소속 농협 조합장과 생산농가, 농촌진흥청과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관계자를 합쳐 모두 20여 명이 몰려온 것이다. 이들이 동반위를 찾은 것도 특이하지만 찾아온 목적 또한 뜻밖이었다. 바로 “대기업 규제를 풀어달라”는 요구였다. 이들은 동반위에 “대기업이 자유롭게 두부를 만들 수 있도록 규제를 풀어달라”고 촉구했다.

사연인즉, 지난해 동반위가 두부제조업을 중소기업 적합업종으로 지정한 이후 국산콩을 사들여 두부를 만들던 대기업들이 두부사업에서 손을 떼거나 규모를 축소하는 바람에 콩 생산 농가가 타격을 입었다는 것이다. 국내 두부시장의 80%를 대기업이 차지하는 현실에서, 이를 중기업종으로 묶어 대기업을 규제하면 가공용 콩 수요가 줄어들 것은 당연하다. 수입 콩을 쓰는 중소 두부업체들과 달리 국산콩을 대량으로 쓰던 대기업들이 수매량을 대폭 줄이자 콩 재배 농가들로선 설 땅이 좁아진 것이다. 중소 두부업체를 살린다고 대기업을 규제하다 엉뚱하게 콩 생산 농가만 파편을 맞은 꼴이다. 중소기업을 살린다는 선의(善意)가 이렇게 엉뚱한 규제로 이어지는 바람에 빚어진 참극이다.

요즘 ‘경제민주화’와 ‘중소기업 육성’ ‘골목상권 보호’ 등 선의와 좋은 취지를 내세워 시행된 온갖 규제들은 정작 의도한 효과를 내지 못한 채 ‘엉뚱한 부작용’만 낳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예컨대 중소·중견기업에 혜택을 준다며 공항 면세점 사업에서 국내 대기업을 배제하자 김해공항 면세점을 세계 2위의 면세점 업체 듀프리가 차지했다. ‘듀프리토마스줄리아코리아’란 합작기업을 세운 뒤 버젓이 정부의 ‘중견기업 확인서’까지 받아 사업권을 따낸 것이다. 정부 세종청사 구내식당의 위탁운영자로 선정된 업체는 세계 3위의 급식업체인 미국계 아라마크의 자회사 아라코다. 이 회사는 급식사업에서 국내 대기업들이 쫓겨난 이후 지난해 국립환경과학원·다산콜센터·신용보증기금의 구내식당 운영권을 따냈다. 올 들어 세종청사를 포함해 5곳의 구내식당 사업도 차지했다.

공공기관의 정보기술(IT) 시스템 통합사업도 마찬가지다. 국내 대기업의 입찰 참여가 금지되면서 한국IBM과 한국HP 등 외국계 대기업의 자회사는 물론 외국계 자본이 대주주인 대우정보시스템·쌍용정보통신 등이 시장을 독식하고 있다. 여기에도 국내 중소·중견기업들이 낄 자리는 없다. 중소·중견기업의 보호 육성이란 ‘명분’ 때문에 국내시장을 외국계 기업의 놀이터로 내주고 있는 꼴이다.

‘동반성장’ 정책이 엇박자를 내는 사례는 또 있다. LED조명시장과 재생타이어사업, 문구류 등 소모성 자재(MRO)의 공공 납품시장에선 많은 일감을 국내 대기업에서 외국계 대기업으로 넘겨줬다. 골목상권 보호를 명분으로 시작된 국내 대기업의 SSM(기업형 수퍼마켓) 규제는 골목상권을 살리기는커녕 일본계 SSM ‘트라이얼 코리아’의 약진으로 이어졌다. 대기업·중소기업의 동반성장이 아니라 우리 정부와 외국계 기업들만 동반성장하는 꼴이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한 가지 이유는 선의로 포장된 포퓰리즘이 난무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민주화니 동반성장이니 하는 구호는 정치적으로 거부하기 어려운 파괴력을 갖는다. 여야를 막론하고 이런 포퓰리즘적 구호를 선점하지 못해 서로 안달할 정도다. 일단 경제민주화·동반성장이란 간판을 단 정책은 그 실효성이나 부작용을 따지지 않고 ‘묻지 마’ 방식으로 입법화되기 일쑤다. 정치권의 무분별한 입법에다 정부의 무사안일한 태도가 겹치면서 앞뒤 가리지 않는 무리한 규제가 남발되고 있다. 여기에 토를 달면 당장 “재벌의 앞잡이냐”란 힐난이 돌아온다.

또 한 가지는 자본의 국적성에 대한 혼돈이다. 우리 자본시장이 개방된 지 오래됐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오너(혹은 지배주주)의 국적을 따져 국내외 기업으로 편을 가른다. 오너의 국적이 한국인인 경우만 대기업 기준을 적용하고, 외국계 기업에 대해선 아예 모기업의 규모를 따지질 않는다. 그 결과 외국계 기업은 모기업이 아무리 큰 글로벌 기업이라도 대기업 계열사로 분류되지도, 규제를 받지도 않는다. 이러한 착시가 ‘선의의 규제’를 낳고 이를 틈 타 외국계 기업이 활개칠 공간이 넓어지는 것이다.

이쯤 됐으면 선의로 포장된 포퓰리즘과 자본의 국적에 따른 역차별의 미망(迷妄)에서 벗어날 때도 되지 않았는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