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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제19화 형정 반세기(12)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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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해방과 수감자들>
높은 벽돌담에 둘려있어도 바깥 사람보다 바깥소식을 더 빨리 아는게 형무소 안 죄수들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그토록 오랫동안 그들과 같이 지내오면서 수감자들이 말이나 글로 설명할 수 없는 비상한 예감을 갖고 있음을 보아왔다.
8·15 해방을 앞두고 수감자들의 반응이 그러했고, 6·25나 1·4 후퇴 때 등 큰 사건이 있을 때마다 그들은 몸으로 그것을 예견하곤 했었다.
44년 말에 이르면서부터 형무소의 각종 보급물자가 달리기 시작, 해가 바뀌면서 식량이 눈에 띄게 부족해졌다. 신문과 방송은 물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형무소 간부들은 『천황의 군대가 승전에 승전을 거듭하고 있다』고 떠들어댔지만 재감자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그 말을 믿으려하지 않았다. 형무소 분위기는 한동안 술렁이다가 이상스러울 정도로 숙연해지곤 했다. 간수도, 죄수도 필요 이상의 말을 하려하지 않아 형무소에는 이상스런 분위기가 감돌았다.
45년 초부터 각급 자동차는 카바이드 또는 목탄으로 움직여야 했었는데 이나마 공급이 줄어들었다. 죄수들을 동원해 나무 뿌리를 캐고 이로써 송탄유를 만들라는 지시가 오는가 하면, 각 형무소에 기술자를 파견, 생고무를 갈아서 비행기 윤활유를 만들려는 계획이 시달 되기도 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형무소에서 제일 곤란을 느꼈던 것은 식량부족이었다.
형무소 식량의 핵이라고 할 수 있는 콩의 공급이 중단된 것은 죄수들 건강에 큰 타격을 주었다. 좁쌀 삶은 것에 볶은 소금뿐, 영양실조로 인한 병발증이 눈에 띄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밤새 멀쩡하던 사람이 아침을 먹다가 그대로 쓰러지고, 이어 죽어갔다. 사상자 수는 평소의 10배 정도로 부쩍 늘었다. 함흥 형무소에서는 45년 6, 7월 동안 무려 3백60명이 굶주림에 못 이겨 죽었다고 전해졌는데, 시체를 변변히 매장하지도 못할 정도였었다고 했다.
8월에 접어들자 총독부는 매일같이 전국 형무소에 비밀전보를 보냈다. 가격 통제령 위반자와 치안 유지법 위반자를 일반 잡범과 분리해 수감하고, 이들은 신분장을 정리하라는 내용이 몇 차례 오더니, 14일에는 『내일 정오에 천황의 방송을 듣고 형무소 및 수감자 처리에 관한 지시를 기다리라』고 했다. 죄수들이 다시 술렁거렸다.
15일 저녁 마지막 공문이 왔다. 일본은 무조건 항복 했으니 사상범의 출옥준비를 독촉하라는 것이었는데 경성 및 서대문 형무소의 사상범은 여운형 송진우에게, 평양은 조만식, 신의주는 이유필, 원산은 강기덕에게…각각 인도하라는 것이었다. 절도사기범은 형기의 3분의1이 지난 자는 가출옥 형식으로, 그 미달 자는 형집 행정지로 모두 출옥시키고 강도·살인·강간죄 등만 계속 수감하라는 지시가 뒤따랐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평소 구박을 받아왔던 일부 조선인 간수들이 일본인 간수를 폭행하는 등 말썽이 있기는 했으나 대부분의 형무소에서 일본인은 앞서지 말고 조선인 간수들끼리 일을 처리, 큰 사고를 겪지 않았다.
당시 평양 형무소 서무과장에 있던 문치연씨의 말에 의하면 평양소장이었던 장택은 15일 하오 문씨에게 각종 서류 및 도장 열쇠 등을 물려주고 집에 돌아가 단식을 시작했다고 한다.
평소 조선인 간수들에게 친절히 대해주었기 때문에 문치연씨 등이 몰려가 귀국할 것을 권유했으나 그는 『나라가 망했는데 돌아갈 곳이 어디 있느냐』고 거절하다가 18일 새벽에 진주한 소련군에 끌려가 총살을 당했다고 한다.
원산·신의주 등에서는 감방에 남아 있던 강력범 등이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17일 밤에 모두 석방했는데, 이들은 석방 즉시 일본인 간수들을 붙잡아다 자기들 감방에 가두는 소동도 벌였었다.
해방 후 사회전반이 그러했듯이 형무소안도 질서의 공백기였다.
특히 소련군이 진주했던 북한 지역은 연말까지 가히 무법천지였다. 소련군은 형무소에 몰려가 도끼로 금고를 부수고 돈과 무기를 털어 가는가 하면 심지어 간수들의 시계, 용돈까지 빼앗아 갔다. 일부 출옥 죄수들은 베잠방이에 붉은 완장을 두르고 소련군을 안내해 다니며 온갖 행패를 다했다.
남한에서는 군경이 실시되었고, 군대 사법부장 김영희 박사가 서대문 형무소를 비롯, 마포·춘천 등 각 형무소를 차례로 접수했다.
내 기억으로 이 땅에서 공식적으로 일본기가 사라진 것은 45년9월9일이라 생각된다. 이날 하오 4시 중앙청(당시 총독부) 광장에서 열린 일장기 하강식 때 36년 동안 이 민족에 대한 착취의 상징이었던 일장기가 내려진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괘씸한 것은 일본인들이 물러가면서 공문서를 불태우고 공금을 횡령하는 등 마지막 발악을 했던 사실들이다.
특별 범죄심사위원회(위원장 이인)가 왜정 경무국 위생과장 아부천의 공문서 소각 죄 및·공금횡령 사건에 대한 재판(재판장 이인·배석 민복기·김판엄)을 열었을 때 국민들은 여태껏 지배자로 군림했던 일본인에 대한 첫 재판이라는 것보다 공분에 못 이겨 몰려왔었다고 생각된다. [제자는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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