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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흘리며 난동 부리던 만취 환자, 남자 간호사 주사 한 방에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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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대한남자간호사회 회장 김장언 서울대병원 수간호사. 그는 “일반 병동 간호사 일을 못 해본 것이 가장 아쉬운 일”이라면서 “요즘 후배들이 급격히 늘면서 남자 간호사를 보는 세상의 시선이 달라진 걸 실감한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척추 병동이어서 어머니·할머니 환자들이 많은데 남자 간호사를 더 좋아하세요. 가끔씩 사위 삼고 싶다는 분들도 계세요. ‘선생님’이라고 부르지만 오래 함께 지낸 환자분들은 ‘박군’ ‘미스터 박’이라고 부르십니다.”

 강남세브란스병원 박종현(27) 간호사는 지난해 대학을 졸업한 뒤 척추 병동(病棟)에서 근무 중이다. 남자 간호사의 근력(筋力)이 필요할 때가 많은 곳이다. 허리 수술 후 보조기를 착용한 환자가 침대에서 일어날 때는 ‘간호사 박군’부터 찾는다.

 경력 2년 차인 박 간호사의 병동에 올해 후배 남자 간호사 백창훈(26)씨가 들어왔다. 남자 간호사도 3교대로 근무하긴 마찬가지. 29일 백 간호사는 오전 근무(오전 6시∼오후 2시)였으나 오후 3시가 돼서야 짬을 낼 수 있었다. 백 간호사는 “처음엔 환자들이 남자 간호사에 대해 배타적일 것으로 생각했는데 ‘여자 간호사들보다 더 잘해준다’며 격려해줘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남자 간호사들은 대개 병원의 수술실·중환자실·응급실·정신과 병동에 배치되곤 했다. 환자·보호자와 직접 마주하는 일반 병동 근무의 기회가 거의 주어지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것도 아니다. 현재 강남세브란스병원의 간호사(809명) 가운데 49명(6%)이 남성이고 이 중 7명은 일반 병동에서 일한다.

 남자 간호사의 일반 병동 근무 비율은 아직 낮다. 서울대병원의 경우 남자 병동 간호사가 2명뿐이다. 서울대병원 조혈모이식 병동 장창섭(37) 수간호사는 이 병원에선 처음으로 2001년 병동 근무 발령을 받았다.

 장 수간호사는 “과거엔 환자나 보호자가 남자 간호사인 자신을 불편해할까 봐 이들을 직접 대할 필요가 없는 수술실·중환자실 근무를 자원했었다”며 “대형 병원에선 전체 간호사의 80%가량이 일반 병동에 배치되므로 앞으론 남자 간호사를 더 자주 보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일부 젊은 여성 환자들은 남자 간호사를 꺼리기도 한다. 특히 소변줄을 달고 뺄 때 거부감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주사를 놓거나 할 때 자신의 신체 일부를 보여주는 것도 불편해한다. 신체 노출 문제가 남자 간호사들을 당황하게 하는 일이 간혹 발생한다. 서울 신림동에서 사회복지법인 장애인 시설을 운영 중인 오경헌(45·대한남자간호사회 부회장) 간호사는 20년 전 겪은 일을 떠올리며 “그때만 해도 남자 간호사가 과연 병원에 필요한 존재인지 의문을 품었었다”고 말했다.

 1993년 당시 한 젊은 여성이 가슴 통증으로 오 간호사가 있던 의정부 성모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오 간호사는 그 환자를 X선 촬영실(영상의학과)로 빠르게 옮겼다. 방사선 검사 뒤 복도에서 침대카에 누워 있던 환자의 가슴엔 담요와 포가 함께 덮여 있었다. 오 간호사가 영상의학과 비품(담요)을 돌려 주기 위해 담요를 들추는 순간 환자의 가슴이 잠시 노출됐다. 옆에 있던 환자 남편이 “네가 뭔데 남의 아내의 가슴을 보느냐”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폭력과 반말 등으로 인한 소동이 종종 발생하는 병원 응급실에선 남자 간호사의 존재감이 돋보인다. 서울대병원 장창섭 수간호사는 “소동을 일으키는 이들과 맞싸우진 않지만 남자가 있다는 사실에 여자 동료들이 마음 든든해한다”고 전했다. 강남세브란스병원 응급실에 근무 중인 7명의 남자 간호사 중 한 명인 이병헌(33) 간호사는 흥분하거나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일부 환자들을 다독이는 역할도 한다.

3년 전 팔뚝의 동맥이 절단된 만취 환자가 자신부터 치료해 달라며 병원 응급실에서 행패를 부렸다. 피가 뿜어져 나오는 팔뚝을 일부러 응급실 곳곳에 뿌려 응급실 전체를 피바다로 만들었다. 이 간호사는 안전요원의 협조를 받아 환자를 진정시킨 뒤 바로 주사를 놓고 응급처치에 들어갔다.

 여성 중심의 간호사 사회에서 소수파인 남자가 적응하기가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니다. 서울대병원 김장언 수간호사는 “가끔 퇴근 후 편하게 맥주 한잔 하고 집에 가고 싶은데 여자 후배·동료와는 동성 친구처럼 대하기 힘들다”며 “여자들 속에 섞여 30년이나 일했는데 아직도 여자 심리를 모르겠다”며 남자 간호사의 애로를 털어놓았다.

 남자 간호사는 아직 수가 적어 병원에선 눈에 띄게 마련이다.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남자라서…”라는 말을 듣기 일쑤다. 전통적인 ‘핑크 직업’의 텃세를 극복하지 못해 중도에 포기하는 남자 간호사도 있다.

 여성 중심의 병원 시스템도 남자 간호사들에겐 불편하다. 남자 탈의실이 없어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병원도 있다. 생리휴가·육아휴직·출산휴가 등 복지 혜택이 여자 간호사에게 집중되는 것도 불만 요소다. 한 남자 간호사는 "예비군 훈련 일정이 나오면 눈치 보며 다른 사람과 근무 시간을 바꾸기 일쑤”라고 말했다.

KBS 드라마 ‘굿닥터’에서 고창석씨가 남자 간호사 연기를 하는 모습. 최근 드라마에 등장할 정도로 남자 간호사들이 크게 늘어났다. [중앙포토]

최근 막을 내린 의료드라마 ‘굿닥터’에 남자 간호사가 등장한다. 얼핏 보면 조폭 같지만 마음이 순박한 조정미(고창석 분)의 역할은 병동 간호사다. 따뜻하고 정이 많아 소아외과 병동 아이들에겐 최고의 친구다.

 의료드라마에 등장할 만큼 요즘 남자 간호사가 많아졌다. 서울대병원·강남세브란스병원 등 일부 대형 병원엔 40명이 넘는 남자 간호사가 근무 중이다. 국내 처음으로 남성(조상문씨·75)이 간호사 자격증을 받은 것은 1962년이다. 남자 간호사 수가 급증한 것은 최근 5년 새다. 전체 남자 간호사의 66%인 4000여 명이 2008년 이후의 자격증 소지자다. 지난 4월엔 대한남자간호사회가 발족했다. 초대 회장은 서울대병원 소아수술실 수간호사로 20년째 근무 중인 김장언씨(54). 그는 1979년 서울대 간호학과에 입학한 남학생 5명 중 유일하게 간호사로 일하고 있다. 서울대병원 어린이병원에서 김 회장을 만났다.

 - 남성간호사회가 아니라 남자간호사회로 칭한 이유는.

 “내부적으로 고민과 토론이 있었다. 남성은 성(性)을 너무 강조하는 것 같고 대비가 강한 느낌이 들어 남자로 정했다.”

 - 남자 간호사 수는 어느 정도인가.

 “현재 간호사 면허를 취득한 남자 간호사는 6202명이다. 공식적으로 통계를 낸 2004년(830명)보다 8배나 증가했다. 올해 간호사 국가시험에 합격한 남자는 1019명에 달한다. 2004년엔 121명 정도였다. 전국 200여 개 간호대학 재학생은 9000여 명에 달한다. 지난해엔 4년제 간호대학에 1281명, 3년제 간호대학에 1629명 등 모두 2900여 명이 입학했다. 충주 교통대학 간호학과의 경우 올해 신입생의 절반이 남학생이다.”

 - 간호사가 되려는 남자들이 많아지는 이유는.

 “2008년 리먼브러더스 파산 사태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경제 불황으로 취업이 힘들어지자 취업이 100% 보장된 전문직인 간호대학 지원이 늘었다. 졸업 후 병원뿐만 아니라 교도소·소방서 등 진출 영역이 넓어지고 있다. 간호대에 지원하는 남학생 중엔 이미 다른 학교를 다녔거나 사회생활을 경험한 뒤 재입학하는 경우가 많다. ‘간호사=여자’란 고정관념과 편견이 희석된 것도 남학생의 간호대 지원 붐을 도왔다. 우리 때는 남자가 간호사를 한다는 것 자체에 반대가 많았고 이상하게 보는 사람도 수두룩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 어떻게 달라졌나.

 “4∼5년 전부터 환자와 가족들의 남자 간호사를 보는 시선이 자연스러워졌다. 과거엔 수술실에 남자가 있으면 신기해하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봤다.”

 - 남자 간호사를 대하는 환자나 가족들의 반응은 어떤가.

 “연세가 드셨거나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에게 인기가 높다. 여자 간호사들보다 힘이 세기 때문에 포지션(위치) 변경을 잘 해주는 것도 좋아한다. 대화를 잘하는 남자 간호사는 입원실에 들어가서 한참 동안 나오지 않는 경우도 많다. 젊은 환자들은 아직 거리감을 두기도 한다.”

- 남자 간호사를 대하는 의사들의 태도는.

"처음 수술실에 들어갔을 때의 얘기다. 왜 내 수술에만 남자 간호사가 들어오느냐며 직접 불만을 표하는 의사도 있었다. 지금은 서로 이해하고 협조하는 관계다.”

 - 남자 간호사 100% 취업은 얼마나 계속될까.

 “미국 텍사스주에선 남자 간호사가 2000년 1만2709명에서 2010년 2만2532명으로 10년 새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전체 간호사 중 남자의 비율도 8.4%에서 10.5%로 높아졌다. 초고령화 사회가 되면서 간호사의 수요는 계속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는 현재 간호사 30만 명 중 2%가량이 남자다. 선진국 수준이 될 때까지는 100% 취업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 미국 외에 다른 나라의 사정은.

 “1995년 영국 노팅엄 대학병원의 당일수술센터에서 2달간 연수를 받았다. 수술실의 남자 간호사 비율은 20% 정도였다. 수술실 간호책임자도 남자였다. 영국에선 남자 간호사들이 편견 없이 일하는 모습이 부러웠다. 미국·유럽은 간호사의 약 10%가 남자다. 이슬람 국가인 이라크의 병원에선 간호사의 대부분이 남자다. 일본·중국에선 남자 간호사를 아직 보기 힘들다. 한국에서 남자간호사회가 출범했다는 소식을 중국 신화사 통신이 보도했을 정도다.”

 - 남자 간호사들은 어디에서 주로 근무하나.

 “힘을 쓸 일이 많이 생기는 수술실·응급실·중환자실에 대개 배치되곤 한다. 최근엔 병동에 배치돼 환자를 가까이서 돌보는 남자 후배 간호사들도 점점 늘고 있다.”

 - 의사직과 간호사직의 남녀 비율의 변화가 눈에 띄는데.

 “모계 사회로 돌아가는 것 같다(웃음). 최근 병원 내 한 의국(醫局)을 방문했는데 모두 여성이어서 잘못 들어왔나 싶어 잠시 머뭇거렸다. 앞으론 여의사와 남자 간호사가 함께 일하는 광경을 자주 보게 될 거다.”

 - 남자간호사회가 첫 번째로 추진 중인 일은.

 “공중보건간호사 제도 도입을 추진 중이다. 남자 간호사도 공중보건의사처럼 농어촌 의료기관에서 공중보건업무를 하면 좋겠다. 새누리당 신경림 의원이 지난해 9월 남자간호사도 의사·치과의사·한의사처럼 병역의무를 공중보건 업무로 대체할 수 있도록 하는 ‘병역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남자간호사회는 구체적인 내용을 보강해 법안에 힘을 실어줄 방침이다.”

 - 남자가 간호사 관련 조직에서 최고위직에 오른 적이 있나.

 “병원 소속 간호사 모임인 병원간호사회 산하에 병원수술간호사회(회원 5500명)의 회장이 남자(건국대병원 우진하 팀장)다. 남자가 전국 대형병원 내 간호사들의 수장(간호본부장·간호부원장 등)이 된 사례는 아직 없다.”

박태균 식품의약전문기자

전국 6202명 남자 간호사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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