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 교육관의 변천|한국교육사 연구회 세미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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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국교육사연구회는 18일 하오 3시 성신여사 대강당에서 「한국여성교육관의 변천」에 대한 강연회를 열었다. 다음은 「근대교육이전」에 대한 손인수 교수(서울시립농대)의 강연과 「근대교육이후」에 대한 최명인 교수(성신여사대)의 강연 내용이다.

<근대교육 이전|유교영향으로 가내예절에만 치중>
문헌에 남겨진 우리 나라 여성의 의식구조를 살펴보면 고려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이조시대 여인들의 자식에 대한 현실에 비해 자아를 위한 추구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조에 들어서 유교를 국학으로 삼음 후부터 여성은 「문서 없는 종」으로 바뀌어 졌다. 그리하여 여성은 자손을 낳아주는 도구에 불과했다.
따라서 여성의 교육은 가내를 중심한 예절에 한정되었고, 이 밖의 독서 강의 및 문묵의 재는 바람직한바 아니었다.
우리사회는 「스크랜튼」 여사가 이화학당(1886)을 설립하기 전까지는 여성을 위한 교육기관을 전혀 갖지 못했다. 그러다가 한말의 젊은 여성들은 기독교 계통 여학교를 통하여 기독교정신과 신식생활방식을 배우게 됨으로써 종래 남존여비의 사상이 모두 중국과 이 나라 유교선비의 잔재주에서 조작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한편으로 이조의 여성들이 그 어려운 주자학적인 명분 속에서도 아름답고 현명한 부도, 이를테면 부덕·부언·부용·부공을 길러가려고 노력한 것을 발견하고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교육받은 여성들이 일부에서 전혀 부덕과 담을 쌓고 지낸 것과 비교하면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다.
우리는 여지껏 우리의 부도에 대한 인식을 너무나 등한히 해 오지 않았나 반성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사회발전에 따라 가족제도가 바뀌어지고 가치관이 달라져 가고 있으나 여성교육의 근본이 되는 부도덕 이념에 있어서는 다름이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의 가정 및 학교교육은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그리고 며느리로서의 부도에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여성들이 누구나 지녀야 할 교양이며, 또한 우리 사회에 절실히 요구되는 「모럴」이다. 손인수 교수<서울시립농대>

<근대교육 이후|전통과 개혁의 갈등으로 개선 늦어>
기독교의 전래와 더불어 시작된 한국여성 교육은 전통적 사회의 제약파 이에 뒤따라야 할 정책의 뒷받침이 없었기 때문에 「전통과 개혁」 「보수와 진보」의 갈등 속에서 그 보급이 천연되었다.
그러나 기독교 선교사들과 혜안을 지닌 기독교인 및 개화인사들의 헌신적 노력은 남녀평등사상을 기저로 한 교육기관을 계속 확장시켰다.
1886년 이화학당을 요람으로 정신여학교를 비롯하여 1908년까지 기독교계 여학교가 11개교, 1906년 진명여학교 설립 후 1909년까지 민간사립계 학교가 4개교나 설립되었다.
또 한편으로는 보수적 여성관에서 탈피하여 근대적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인식시키고자 하는 일관된 노력을 「독립신문」에서 엿볼 수 있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신학제가 마련되고 1908년에야 한성고등여학교(현 경기여고)가 처음으로 관립여학교로 세워졌다.
1910년 한일합병 이후 일본 식민지하에서 독립운동은 일대 교육구국운동이 전개되고 여성활동은 1919년을 전후하여 국권회복이라는 표방아래 여권신장운동으로 보수사회의 제약에서 벗어나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찾자』라는 운동으로 번지고 1920년대는 애국운동과 함께 남녀평등이라는 기치아래 여권신장운동이 적극화되고 이것은 여성에 대한 교육의 확장이라는 실제적인 현상으로 나타난다. 1945년 해방 이후 여성교육은 양과 질의 많은 발전으로 여성의 사회참여도 격증되고 여성사회도 크게 변화되었다.
오늘에 이르러 여성교육의 방향은 뚜렷해졌으나 그 실현과정에서 남성위주의 사고방식, 여성본래의 분야에서 전문적인 사회참여, 그리고 시대사조에 맞는 한국적인 여성상을 어떻게 성립해야 할 것이냐의 과제가 남아있다고 보겠다. 최명인 교수<성신여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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