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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5)-제자는 필자|<제18화>명창 주변(6)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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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창악의 인식>
이미 게재된 글 가운데 몇몇 귀절에 대해 일부에서 오해가 있는 듯 하기에 여기 밝히고 넘어가려 한다.
창악의 기반이 그리 고귀한데서 비롯되지 않은 것처럼 이야기 됐던 것은 창악이 일종의 민속 음악으로서 귀족 계급인 양반 사회에서보다는 오히려 서민 사회에서 널리 보존 전승되어 왔다는 뜻이었다.
우리 나라 고유의 음악을 크게 구분하면 궁중음악과 민속 음악으로 나눌 수 있다. 궁중음악에는 아악 당악 경악 등이 있고 민속 음악은 창악 풍류 민요 농악 무용곡 등으로 나뉘어진다. 궁중음악은 역대 주궁에서 특권층의 전속물로서 궁중 제례나 궁례 때에 사용했던 것으로 일반 대중과는 현격한 거리에 놓여 있었다.
한편 민속 음악은 일반 대중 사이에서 발생하였으며 풍농과 풍어를 기원하는 농어촌의 제행사와 액을 때우고 만복을 축수하는 굿 등의 행사, 그리고 오락적 제잡희 가운데서 자라나 선민 또는 광대 재인에 의해서 보존 전승되어 온 것이다. 따라서 민속 음악인 창악은 우리의 역사·문화·사회·종교적인 모든 요소를 함축하여 이루어진 민속 음악의 정수로서 겨레 예술의 결정체인 것이다.
이렇게 고귀한 민속 예술을 신통치 않게 간주한 것은 그때그때 소위 양반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였었다. 이조 말기에 이르러 이러한 몰이해가 점차 자취를 감추고 많은 명창들이 벼슬의 자리에 올랐음은 우리 창악사에 크게 기록될 만한 것이었다. 벼슬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의 당당한 예술가로서 이들 명창들이 대중들로부터 높이 존경받았음은 두말할 나위조차 없다.
내가 이동백과 대화를 나눈 대목에서도 일부에서는 오해를 하고 있는 듯 하나 사실은 그분의 예술가로서의 위대할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 겸양의 미덕을 지닌 훌륭한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내가 그분을 깍듯이 대선배로 선생님으로 모셨던 것은 물론이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창악에 관한 각종 공연은 그때까지의 우리 나라 창악 사상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물론 일제하였기 때문에 여러 가지 제약이 뒤따랐지만 나라를 잃은 백성들에게 민주 의식을 고취시킨다는 숨은 뜻은 이들의 공연 활동에 더욱 채찍질을 한 것이다.
1930년에는 고수로서 당대 제1인자며 명창인 한성후를 중심으로 「연예단」이 조직되었고 이를 전후하여 조선극장 우미관 단성사 동양극장 등 공연장도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따라서 명창들의 무대는 전보다 훨씬 푸짐해졌으며 이들에 대한 대중들의 인기도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특히 인기가 있었던 것은 명창들이 출연하는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등 창극 공연과 여류 명창들의 판소리 공연이었다.
우미관 개관 첫 공연 때는 한창 명성을 드높이던 박녹주의 창이 있었는데 박녹주의 창이 한창 진행되던 중 일부 관중이 환성을 지르며 무대로 몰려드는 바람에 박녹주는 창을 다 끝내지도 못하고 빠져 나와 인력거를 타고 도망간 일도 있었다.
서울에서 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명창에 대한 인기는 굉장하여 어느 땐가 대구에서 열린 남녀명창대회는 모든 대구 사람들이 관심을 가진 가운데 진행되었다. 이때 가장 인기를 끌던 명창은 김녹주와 김초향이었는데 이들에 대한 인기는 지금 예능인들에 대한 인기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절대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 두 사람은 「라이벌」의식까지 생겨 그 명창 대회는 마치 김녹주와 김초향의 경연 대회장을 방불케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인기 있는 사람들에 대한 사생활은 늘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게 마련이다. 이것은 인기 있는 사람들 주변에는 이성들이 따르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여류 명창들께는 갖은 유혹이 끊임없이 뒤따랐다고 대개의 명창들은 이러한 유혹을 이겨내고 꿋꿋이 예술에 정진했으나 걔 중에는 그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여 끝내는 예술까지 버리게 되는 일이 아주 없지도 않았다. 여하튼 이 무렵의 명창들에게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이야기들이 출몰하였다.
명창마다 특히 잘 부르고 대중들에게 인기도 있는 소위 18번이 있게 마련인데 김녹주는 18번이 『아스라 세상사 쓸데없다…』는 대목이었고 신금홍은 그 애달픈 사랑을 잊지 못해서인지 공연 때는 꼭 처음에 울음 섞인 목소리로 『인연이 있고도 이런가 인연이 없어서 이런가…』를 불러 장내를 숙연하게 하곤 했었다.
한편 임방울도 일찍 죽은 그의 연인을 그려 『추억』이란 자작의 노래에서 『앞산도 첩첩하고 뒷산도 첩첩한데…』를 구성지게 부르곤 했다.
이야기가 샛길로 흘렀지만 좌우간 30년대를 전후한 시기는 황금기로서 창악 공연이 없는 날이 거의 없었다. 가장 장기적으로 「히트」한 작품은 역시 창극 『춘향전』이었는데 당시 『춘향전』에는 춘향 역에 박녹주, 이도령 역에 김연수, 그리고 이 밖에 이동백 송만갑 김창룡 등 쟁쟁한 명창들이 출연했었다. <계속> 【박헌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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