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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의 도일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작금 우리 나라 국내외 정세가 국가 민족의 명운을 좌우할이만큼 중대한 국면에 처해 있음은 조야를 막론한 공통된 인식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실 인식의 심도에 있어서는 물론 여·야나 일반 국민 사이에 정도의 차가 있을지 모르나, 어쨌든 최근 우리를 둘러싸고 나라 안팎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가 모든 국민에게 비상한 경각심을 요구하고, 국민의 총화적 단결이 이룩됨이 없이는 어쩌면 파국적인 위기를 가져올 수 있을 만큼 중대한 고비를 맞이하고 있음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국민의 선두에 서서, 이 중대한 난국을 헤치고 나가 국민에게 희망과 용기를 북돋워 주는 향도 역할을 해야 할 사람들, 예컨대 위정당국자와 국회의원들의 행태가 뜻 있는 국민의 분격을 사기에 족할 만큼 각성도를 결하고 있음은 큰 유감이라 아니할 수 없다.
우선 최근 국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물가문제 등 국정 전반에 걸친 대정부질의에서 여·야 국회의원 및 정부 당국자가 응수하고 있는 질문 및 답변내용은 한결 같이 수박 겉 핥기식이 아니면, 격화소양의 느낌을 주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같은 내용의 질문을 여러 사람이 두서도 없이 장황하게 되풀이하는가 하면, 이미 오래 전에 저질러진 정책상의 하자로서 당면 문제와는 별다른 관련이 없는 문제들을, 그것도 정확한 기초자료의 조사도 없이, 물고 늘어져 귀중한 시간을 허송하는가 하면, 이에 대한 정부측 답변이라는 것도 아무런 구체성이 없는 선처 약속에만 시종하고 있는 감이 없지 않다.
뿐만 아니라, 국회 본회의장에서 그나마 이 같은 질의 응답이 벌어지고 있는 시간에 상당수의 국회의원들이 자리를 비운 채, 휴게실에서의 잡담과 바둑·장기에만 골몰하고 있는 몰골들은 참으로 그들의 정신 자세가 얼마나 해이돼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일부 위정당국자나 여·야 국회의원들의 이 같은 정신 자세의 해이는 최근에 큰 말썽을 빚은 소위 고급 승용차 시비나, 국회 조사 활동에 뒤따르고 있는 석연치 않은 풍문 등에 의해서도 여실히 입증되고 있다.
그나 그뿐이랴, 제8대 국회의 첫 정기국회가 개최 중에 있고, 당면한 국가 안보문제, 물가대책문제 등 국가의 운명과 국민 생활의 기저에 관계되는 문제를 가지고 국민 대표기관으로서의 국회가 마땅히 국민 전체에 대해서 안심하고 생을 영위할 수 있는 어떤 방향 감각을 제시해야 할 이 시기에, 32명이나 되는 여·야 국회의원들은 대거 일본으로 건너가 그다지 생산적이라고만도 할 수 없는 시간을 국민의 혈세를 가지고 보내고 있는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갈이 일본 동경에서 지난 9, 10일 양일간에 열렸던 한·일 의원간담회에는 한국측에서 이동원 국회외무위원장을 단장으로 한 32명의 여·야 국회의원이 참석했으며, 일본측에서는 자민당 소속 중·참의원 지명이 참석했다고 하는데 양국 국회의원간의 비공식적 회합인 이 간담회에 한국측만이 이처럼 큰 열의를 보이고 있는 것은 국민으로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오늘의 외교가 정부 대표간의 공식적이고 딱딱한 접촉을 통해서 보다도 두 나라 정계요인간의 부드러운 간담을 통해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잡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일본의 집권당인 자민당 내에는 최근 대한 정책을 둘러싸고 서로 여러 갈래로 의견이 갈라져 있다 하므로 자민당 국회의원과 직접 접촉하고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일본의 정부 여당으로 하여금 한국을 이해시키는데도 상당한 도움을 줄 것이다.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우리는 한·일 의원간담회를 중요시한다.
그러나 우리가 크게 의문으로 생각하는 것은 정기국회개최 중에 있는 우리나라 의원이 한꺼번에 32명씩이나 동원해서 방일하여, 반드시 이런 모임에 참가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일본 국회는 동경에 있고, 의원 수는 중의원과 참의원을 합한 의원 수는 도합 7백30명을 넘으니, 일본 의원이 53명쯤 참가했다는 것은 숫적으로 보아 적다면 적지, 결코 많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정원2백4명의 한국 국회가 정기 국회를 개최 중임에도 불구하고 32명이나 되는 의원들을 대거 동경으로 보냈다는 것은 국가 체면을 손상시키는 일이지, 결코 국가 위신을 높이는 처사는 아닐 것이다. 국회의원의 외유병-국민외 혈세를 가지고 이렇다 할 목적 없이 외국을 호사스럽게 여행다니는 버릇은 결코 작금에 시작된 것이 아니지만, 새로 성립한 제8대 국회 벽두에서부터 한국 국회의원이 이처럼 대거 동경에 출장하는 것이 관례화 한다면 한국이 마치 일본의 종속국이나 되는 것 같은 인상을 내외에 주어 조국을 스스로 모욕하는 결과가 된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위정당국자와 여·야 국회의원은 국민에 대해 먼저 그들의 정신 자세가 떳떳하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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