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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제 18화>명창주변|박헌봉(제자는 필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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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여류명창 등장>
지금은 남자명창보다 여자명창이 수적으로 월등히 우세하지만 명창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첫 여류명창은 남자 쪽보다 등장연대가 훨씬 뒤진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이조시대의 여류 창인들이 대체로 3패(기생)나 광대, 혹은 무녀였는데 그나마도 이들의 주축을 이루는 기생들이 이조 말에 이르기까지 잡가나 창극조 따위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생들은 소리를 한다고 해야 시조나 가사가 고작이었고 따라서 8명창이 한창 활동할 때만해도 여자가 명창이 되는 것은 감히 생각조차 하지 못하였다.
기생들이 창악을 하기 시작한 것은 시대적인 조류로 보아 마땅한 것이었지만 최초의 여류명창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대원군의 힘이 많이 작용하였다.
여류명창의 비조라고 불리는 채선은 전북 고창출신으로 어렸을 적부터 명창 신재효의 가르침을 받아 꽤 높은 경지에까지 이르렀으나 대원군의 부름을 받아 그의 창 솜씨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을 때까지 그는 무명의 시골기생이었던 것이다.
채선이 대원군의 총애를 받아 여류명창으로 세상에 그 이름을 떨치고, 이와 함께 그의 스승인 신재효가 채선을 가르친 공로로 종2품 오위장 벼슬을 받게 되자 창하는 기생들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태도도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여류 명창이 예술가로 크게 명성을 떨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류 명창과 기생은 따로 떼어놓을 수 없을 만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거의 모든 여류 명창들이 권번을 통해서 발탁되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권번을 통하지 않고는 여류 명창이 나올 수 없었던 것이다.(정노식 저 『조선창극사』중에서)
이조 말기와 일제하의 기생들은 대략 3패로 갈려져 1패의 한성 권번은 일명 약방기생인 고급기생들만이 모인 곳이었고 2패의 다동 권번, 3패의 신창 권번은 각기 1패의 한성 권번과는 큰 차이가 있는 권번들이었다. 따라서 여류명창들이 1패의 한성 권번 출신인 것은 두말할 나위조차 없다.
비록 기생권번이지만 송만갑 이동백 등 1류 명창들을 모셔놓고 창을 배우는 이들의 태도는 한결같이 진지했으며 어쩌다 술자리에 불려 나가게되어도 이들은 보통 기생과는 달리 소리를 하는 외에 다른 일은 별로 하지 않았다. 또한 손님들도 대개 수준이 높아 창 듣는 일 이외의 일로서 이들을 부르는 일은 거의 없었다.
더우기 이들 여류 명창들은 비록 권번에 적을 두고 있었으나 차차 공공장소에서의 일반공연을 통해 대중과 늘 가까이 접촉하고 있었으므로 대중들에게도 기생이라는 「이미지」보다는 예술인이라는 「이미지」를 더 많이 주었었다.
초기의 한성권번 출신으로서 대중과 가까웠던 여류 명창들로는 김녹주 배설향 이화중선 김추월 신금홍 등이었다.
여류 명창을 계보별로 살펴보면 신재효가 채선을 최초의 여류 명창으로 등장시킨 뒤 역시 허금파를 가르쳐 제2의 여류 명창이 되게 했으며 이들 뒤의 여류 명창이 한성권번의 김녹주 배설향 이화중선 등이고 그 다음이 현존 여류 명창인 박연주 김여난인 것이다.
여기서 꼭 밝히고 넘어가야 할 것은 여류 명창들에 대한 사회일부의 불투명한 오해에 관한 것이다. 여류 명창이 등장한 이후 여류 명창이 과연 예술가냐 재주 있는 기생이냐에 대해서 늘 논란이 돼왔었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여류 명창은 예술인이다. 다만 권번이다, 기생이다 하는 것을 거치지 않고는 창악계에 나설 수 없는 사회였었기 때문에 그러한 과정을 거쳐야했던 여류 명창들에 대해 긍정적인 자세로서의 이해가 있어야 할 것이다.
남자 명창들에게도 많은 일화가 뒤따르지만 여류 명창들은 그들대로의 그러한 특수한 상황 때문에 좀더 복잡한 일화들이 꼬리를 문다. 우선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는 최초의 여류 명창인 채선과 그의 스승인 신재효에 관한 이야기다.
채선은 신재효에 의해 잔뼈가 굵었으나 채선이 대원군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올라간 후로는 채선을 만날 길이 없었다.
원래 예정으로는 서울에 잠깐 머무르고 다시 고창으로 내려가기로 했으나 대원군이 놓지 않을뿐더러 채선 자신도 화려하고 풍성한 서울생활이 계속되자 시골 갈 생각을 까맣게 잊었던 것이다.
물론 채선과 신재효는 사제지간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매일 곁에 두고 아끼며 정성껏 노래를 가르치던 채선이 없어지자 신재효는 외로움을 느끼기 시작했고 그 외로움은 곧 연민의 정으로 뒤바뀌었다.
그렇다고 대원군 곁에 있는 채선을 내려오게 할 수도 없었다. 신재효는 생각 끝에 노래를 지어 채선에게 보냈는데 이것이 곧 그 유명한 『도리화가』이다. 이때 신재효는 59세였으며 채선은 24세였다. 『도리화가』가운데 채선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구름 같은 머리털은 타마계(타마계=말 위에 떨어진 비녀) 아닐런가. /여덟팔자 나븨눈섭 서귀인(고대중국의 미녀)의 그림인가./선작한(환한) 두 살 작은 편편항운 부듯치고 /이실 속의 붉은 앵도 번소(번소=고대중국의 미녀)의 입일런가.<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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