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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왕 서방」에 교태 떠는 일조야|문상객 왕국 권 맞은 일본의 암중모색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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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동경=조동오 특파원】지금 일본은 왕 서방의『비단 바람』속에 휩싸였다. 빛이 나는 비단대신 무명옷에 모택동 배지를 가슴에 단 왕 서방이 이른바「일본 제국주의자」의 땅을 밟은 것은 25일 밤 일-중 우호협회부회장의 직함을 가진 거구의 왕국 권은 자민당의 고문이자 일본과 중공의 징검다리 역할을 맡아 온 고 송촌겸삼씨의 문상객으로 방일한 것이다. 문상객은 전례 없이 일본 정부의 고관의 마중을 받았고 성전 사회당수, 죽 입 공명당 위원장 등 야당 영수, 그리고 중공경사에 정치생명을 건 자민당의 등산애일낭 의원 등 중공로비스트들의「열성적」(?)인 환영을 받고 동경에 입성한 것이다.
물론 왕의 입국이 일본으로서는 미승인 국의 요인에 대한 최초의 환대였다.
닉슨 미대통령의 일본의 어깨를 넘은 대 중공 서커스가 이만큼 일본 조 야를 뒤흔들어 놓았다.
신중파 좌 등 공권의 뿌리가 흔들린 것은 아닐 터인데도 일본의 매스컴은 한 정치인의 입원실에 보내 온 중공수상 주은래의 꽃을 대단한 기사로 취급했고 중공요인의 위문 전보가 핫·뉴스로 귀중한 지면을 뺏었다. 왕의 입국 허가기사부터 왕의 입국후의 동정은 연일 1면 대부분을 차지했고 송촌씨의 장례식에서 좌등 수상과 악수하는 왕의 사진은 달나라를 정복한 인간과 같이 처우였다.
하지만 왕 서방은 에누리없이 흥정을 마다하고 좌등 수상과의 면담을 거절했다.
왕 서방의 내력은 그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연간 12억 원의 거래 액을 갖는 일본과 중공시장에 뚫린 가느다란 길목에 있는 파수란 것은 공지의 사실이다. 일본은 그를 중공이 파견한 거물 밀사로 평가하고 있다.
그가 일-중 우호협회부회장으로 취임한 문화혁명 전까지 그는 바르샤바 미-중공 대사 급 회담의 중공대표였다.
장막 속 사람들의 경력이 대부분 불분명하듯 그도 하남대학 중퇴라고만 알려졌다. 모택동 정권이 성립한 1949년 제1기 정치협상회의에 출석했고 그후 열 하 성 서기, 인민대표대회(국회)의 열 하 성 대표, 55년에 열 하 성장이 되었다.
열 하 성이 하 북 성에 병합된 후 인민대표대회 하 북 성 대표로 있다가, 60년에 외교계에 전신, 주 동독·주 폴란드 대사를 역임했다는 것이 알려진 경력의 전부.
바르샤바 회담에서는 공산권 특유의 원칙을 강직하게 밀고간 형의 인물로 알려지고 있었다.
대 일본 부임자가 된 후에는 온 후 한쪽으로 성격이 전환됐다고 들린다.
『알 수 없을 만큼 깊고 넓은 외교』(산 경 신문 26일 사설에서)를 지니고 암중 모색의 일본외교 속에 뛰어든 왕은『사탕을 보고 덤벼드는 개미와 같은』(산 경 사설에서)재계·정계의 면담요청에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좌등 수상의 면담요청은『일본의 근본적인 대 중공정책에 전환이 없다』고 일축하면서 하나의 중국을 고집했지만 자민당 내 중공 파견 원, 야당 당수들, 일-중공 무역의 길잡이들과 기꺼이 만나『호호』『사사』를 연발했고, 일본의 거물정객들은 왕의 위세 앞에 간교한 웃음을 팔았다.
지난 방일 송촌씨 장례식 날 좌 등과 대면하는 광경을 자상히 보도한 독보신문 기사가 대륙의 강자(?) 중공과 작은 섬나라 일본의 관계를 드러냈다. 좌 등 씨가 내민 손을 왕씨가『큰손으로 꽉 잡았다』고…. 왕 서방의 손을 잡은 형광(?)의 좌 등 수상은 관저에 돌아와서도 몹시 가벼운 기분으로 기자질문에, 문=왕씨의 손은 어떠했는가? 답=아주 부드러웠어. 문=눈초리(?)는? 답=굳지는 않았어. 오히려 굳어진 것은 하기수이(일-중공각서무역 일본대표=자민당 의원)이었어. 문=또 만날 건가? 답=찬스가 있으면…하고 대답하고 유쾌한 표정이었다.
왕은 방일의 선물로 매년 때를 놓치던 일-중공 각서 무역의 연내 교섭개시, 동 무역사무 소원의 배 증 이란 강사 밑천을 가져왔다. 그러나 아무 준비도 없이 미국의 돌연한 결정에 당황한 일본은 왕과의 접촉으로 일본서 이루어진 핑퐁 외교와 같은 극적인 계기를 잡으려했다.
좌 등 정권은 오히려 자당내의 반 좌 등 세력과 사회·공명·민사의 야당, 그리고 재계에서 조바심을 내고 있는 중공의 우인들에게 포위되어 고립하는 딱한 선물을 받았다.
좌 등 수상이 즐겨 말하던 중국 대륙과 일본의 역사적인 관계로 보아 중공이 일본의 우인일 수는 없었다.
일본이 착각하고 있는 것은 우방미국이 일본의 머리를 뛰어 넘어 중공과 접근한 것이 아니라 중공이 일본의 머리를 더디고 미국과 흥정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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