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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제자는 필자>|<제17화>양화초기(6)이종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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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05면

<모델 구인난>
양화초기에는 풍경화보다도 인물이 많았다. 학교에서도 인물만 그리는 경향이고 그런 교육을 거친 양화 가들은 자연 인물화를 주로 제작하기 마련이다.
서양화의 본고장인 유럽에서 풍경화의 발전은 20세기에 들어 세잔 이후이다. 하물며 동양화에 익숙한 우리 나라 사회에서는 유화풍경이 넹큼 먹혀들리 만무하다. 주택의 구조도 재래의 서화가 알맞다. 그래서 양화 가가 가장 잘 팔리는 데라면 초상화밖에 없는 형편.
그러나 한국사회의 실정에서 모델을 구하는 일이 좀처럼 쉽지 않았다. 초상화는 십중팔구가 남자이지만 보통 인물화의 모델로는 여성이 필요하다. 그 여성 모델은 남녀 칠세 부동 석의 관습에서 생각하면 안될 말이다. 실제가 그러했다. 착의의 모델도 어려운 터인데 나체의 모델이란 더더군다나 꿈도 꾸지 못했다. 김관호씨의 졸업작품이 대동강에서 목욕하는 두 여인을 소재로 삼았지만 실제 그 누드·모델은 일본에서 그린 것일 게다.
당시 일본에서는 모델을 자유롭게 구해 쓸 수 있었다.
동경에만도 우에노 등 서너 군데의 모델 소개소가 있어서 일요일에 가면 지망생이 가뜩 모여 있었고 옷을 벗겨보면서 택하는 경우도 있었다. 제작시간은 아침8시부터 12시까지 4시간씩 하루 모델료가 착의에 80전, 누드에는 1원∼1원20전.
파리에 가보니까 모델이 화실로 찾아다니며 써 달라고 하는 판이었다. 미술의 도시 파리 시내에는「아트리에」가 많이 흩어져 있는 까닭에 월요일 아침이면 갖가지 복 색의 모델이 문을 두드렸다. 유럽 각국의 고유복식은 물론 옛날 것도 있고 심지어 인디언차림까지 있다.
그런데 양화 가라야 몇 사람 안 되는 우리 나라에서는 직업 모델이 있을 리 없다. 고작해야 기녀를 꾀어 불러들이고 그렇지 않으면 가족이나 친척을 그리기 마련이다. 고희동씨가 묵화를 그릴 초기에는 친척도 어려웠겠고, 아마 따님이나 몸종 같은 여자만이 가능했을 것이다.
19l5년7월 춘 곡이 졸업직후에 권 번 기생을 모델로 삼은 얘기는 신문에 일대 뉴스로 보도되었다. 『양화의 선구, 모델의 선편』이란 기사제목 그대로 초유의 일이라서 장안의 화제가 된 것이다.
『조선에 서양학가로 처음인 고희동씨는…공진회미술관에 출품하기 위하여 그림을 그리려하나 원래 서양화라는 것은 동양화와 같이 생각되는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모델이라 일컬어 실지에 있는 물건을 보고 그리는 것이 주장인데 씨의 뜻은 미인 화를 그려 출품할 계획이라. 그런즉 미인의 모델이 있어야 할 터인데 동경이라든가 서양각국의 도회에는 이 모델을 직업으로 삼는 남녀가 비상히 많이 있으나 서양화라는 것이 조선사람으로 처음인즉 모델을 상 외라. 모델이라는 말도 아는 이가 적어 씨는 적당한 미인의 모델을 얻기에 여러 날을 허비했다.
그런데 경성 신창조합에 아무개 하면 알만한 미인이 있으니 이름이 채 경이라. 당 년 29세의 꽃다운 몸이요, 고향은 황해도 황 주라던가. 용 자는 꽃이요, 태도는 달이라던 옛사람의 말도 채 경의 외모를 두고 한 말인지.
정다운 눈초리는 가을의 물결이요, 다 한한 음성은 옥 박의 구슬인 듯. 가는 눈 사르르 감고 수심가 1일을 빼 일 때에는 아 매 애 여린 풍류 낭의 마음을 녹이는 모양이라….
고희동씨가 공진회에 출품할 미인화의 모델을 구한다는 말을 풍 편에 들었던지, 내야말로 명화 가의 붓끝에 자태를 비쳐내어 공진회미술관에 한 광채 크게 내어 전국미인의 부러워하는 과녁이 되어보리라고 제일 먼저 모델 되기를 소개하니, 고씨도 그의 귀에 다른 미인의 이름을 제쳐놓고 채 경의 묘 태를 모델 삼아 일전부터 30호 화포 위에 선연한 자태를 단청으로 옮기는데, 날마다 그림이 조금씩 되어 가는데 채 경이는 재미가 신통하여 <아! 기생과 점점 같아집니다>.
신문 기사는 모든 기생이 모델 되기를 흠 망할 듯 싶게 썼지만 막상 그렇지 못했다. 보통 20분간 그리고 10분 쉬는데 고정 포즈를 취하고 있는데 여간 고역이 아니기 때문에 이틀쯤 나오다간 그만두는 게 상례였다. 소리하고 춤추는 편이 낫다는 것이고 작품하나를 완성하려면 진땀이 났다. 따라서 모델료도 엄청나게 지불할 수밖에 없었다. 기생의 출장요가 시간당 1원20전이므로 모델료는 그 배를 쳐야하고 하루 2시간쯤 하면 5원을 집어줬다.
착의도 그러한데 누드는 감히 생각할 수가 없다. 누드·모델은 시대가 바뀐 해방 후에도 구하기 쉽지 않았다. 미술대학에선 늘 구인광고를 내지만 왔다가도 옷을 벗는다면 혼비백산하여 달아나곤 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월급제로 모델을 채용하고 각 대학이 서로 돌려가며 쓰는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은 누드작품을 얼마든지 보지만 50년 전에는 영광스런 김관호의 졸업작품조차 전라여서 신문에 게재치 못했다. 내가 28년에 프랑스에서 돌아와 귀국 전을 가질 때에도 누드가 있다고 해서 검열하는 순사가 말썽을 부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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