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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원전수출 도장 찍은 날, 재 뿌린 고이즈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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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아베 신조(安倍晋三·59) 총리와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71) 전 총리의 ‘사제(師弟) 설전’이 점입가경이다.

 스승 격인 고이즈미가 “총리가 마음만 먹으면 ‘탈(脫)원전’을 할 수 있다”고 여론전을 펼치자 아베는 “고이즈미가 내게 매우 중요한 분이지만 무책임한 발언을 하고 있다”며 정면에서 반격을 가하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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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베 총리는 29일 터키를 방문해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총리와 회담을 하고 일본 미쓰비시(三菱)중공업과 프랑스 기업 아레바로 구성된 컨소시엄이 터키 흑해 연안 시노프에 원전 4기를 건설하는 데 정식 합의했다. 그동안의 ‘배타적 우선협상권자’ 자격에서 정식 계약으로 ‘도장’을 찍은 것이다.

 국회 회기 중임에도 불구하고 5월에 이어 반년도 안 돼 아베가 또다시 터키를 방문한 것은 원전에 대한 집념 때문이다. ‘아베노믹스’의 핵심인 성장전략에 있어 원전은 빼놓을 수 없는 카드다. 발행부수 1000만 부의 요미우리(讀賣)신문, 여론 주도층에 막대한 영향력을 갖는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이 아베의 ‘원전 추진’을 강력 옹호하고 있는 만큼 아베의 ‘원전 세일즈’에는 거침이 없다.

 그러자 ‘탈원전’ 전도사를 주창하고 있는 고이즈미가 바로 맞불을 놓았다. 아베가 해외에 나가 원전 수출에 도장을 찍은 날에 맞춰 진보 야당이자 ‘탈원전’을 주창하는 사민당의 요시다 다다토모(吉田忠智) 당수와 머리를 맞댄 것이다. 아무리 정계를 은퇴했다고는 하지만 자민당의 전임 총리가 야당의 당수를 따로 만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야당 당수까지 동원해 아베에 대해 전방위 압박을 가하고 나선 것이다.

 2006년 총리에서 물러나 2008년 정계 은퇴한 고이즈미는 아베를 정치적으로 키운 인물. 자민당의 같은 파벌 안에서 정치적으로 중량감이 떨어지던 아베의 보호자 역할을 도맡았다. 2001년 자신이 총리가 된 다음에는 아베를 관방부장관으로 발탁해 자민당 간사장, 관방장관으로 차례차례 키우며 후계자로 낙점했다.

 고이즈미는 이날 요시다 당수와의 회담에서 “지진대국인 일본에서 과연 (방사성 폐기물)의 최종 처분이 가능하겠는가”라며 “더 이상 원전을 계속하는 건 무리”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또 “동일본 대지진의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태양광·풍력 등 대체에너지에 보다 유리한 정책을 펴야 한다”며 원전에 의존하는 아베 총리를 비난했다.

 하지만 고이즈미는 ‘탈원전’을 고리로 한 신당 창당에는 나서지 않을 뜻을 명확히 했다. 요시다 당수가 이날 “원전에 반대하는 세력끼리 연대하는 게 어떠냐”고 운을 뗐지만 고이즈미는 “난 정치적 발언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탈 원전’을 여론화하면 된다”고 거절했다. 정치세력과 손을 잡을 경우 자신의 ‘순수성’이 공격받을 것을 우려해서다. 다만 “(아베에게는) 계속 내 주장을 펼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고이즈미·아베의 신경전 속에 곤란한 입장에 놓인 건 고이즈미의 차남 고이즈미 신지로(小泉進次<90CE>·32). 아베 정권의 부흥담당 정무관(차관보급)인 만큼 부친 편을 들기도 부친을 비난하기도 어려운 처지다. 그는 29일 “아버지가 누구를 만나는지 나로서는 컨트롤할 수 없다. 아버지는 아버지, 나는 나”라고 말했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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