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Report] 신이 탐한 이 포도밭 … 붉은 물방울, 한국을 탐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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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현지시간) 칠레의 로스 바스코스에서 이마트와 와이너리 관계자들이 한국 소비자들을 위해 맞춤 생산한 ‘뀌베20’을 맛보고 있다. 왼쪽부터 호세 루이스 오르티스 포도밭 관리담당, 마르셀로 가야르도 수석 와인메이커, 이형순 이마트 주류담당 바이어. [사진 이마트]

지난 19일 오후.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 공항에서 남서쪽으로 고속도로를 타고 두 시간 정도 달리자 콜차구아 계곡의 ‘로스 바스코스’ 와이너리에 도착했다. 세계 5대 샤토(1등급 그랑크뤼) 중 하나인 프랑스 ‘샤토 라피트 로칠드(이하 라피트)’가 1988년 인수한 곳이다. 로칠드 회장인 에리크 드 로칠드 남작이 현장을 직접 둘러보고 골랐다고 한다. 프랑스 특등급 샤토가 칠레에 설립한 최초의 와이너리다. 라피트는 와인을 소재로 한 만화 『신의 물방울』의 작가가 ‘무통 로칠드·오브리옹·마고·라투르 등 5대 샤토 중 으뜸’이라고 평한 곳이다. 라피트가 만든 1869년산 와인 한 병이 2010년 홍콩 소더비 경매에서 23만 달러(약 2억6400만원)에 팔려 사상 최고가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해발 200m의 구릉 밑 평지에는 580㏊(약 175만 평)의 포도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어른 무릎 높이의 포도나무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줄 맞춰 서 있다. 수석 와인메이커 마르셀로 가야르도(44)는 “바다에서 40㎞ 떨어져 늘 해풍이 불고 낮과 밤의 기온 차이가 크다”며 “와인 재배엔 최적의 기후”라고 말했다. 포도밭 관리담당 호세 루이스 오르티스(32)는 “토양에 석회석이 적당히 섞여 물이 잘 빠지고 유럽과 달리 필록세라(포도나무 병충해의 일종)의 피해를 전혀 보지 않는 점도 로칠드 남작이 이곳을 고른 이유”라고 덧붙였다. 나무들 옆에 가로로 길게 붙은 고무 호스의 용도를 묻자 가야르도는 “최근 설치한 관수 자동화 시설”이라고 설명했다. 카베르네 소비뇽·시라 등 품종과 강수량에 맞게 물을 공급하기 위한 것이다. 그는 “포도나무는 이곳처럼 땅에 낮게 붙어 있을수록 좋은 품종”이라고 덧붙였다.

로스 바스코스 와이너리의 저장고에서 와인을 담은 오크통이 늘어서 있다. 고품질 와인을 만들기 위해 프랑스 라피트에서 제작해 공수했다.

 와인셀러에 들어서자 수백 개의 오크통이 진한 향을 풍겼다. 프랑스 라피트에서 제작해 공수한 것들이다. 보통 대중적인 와인에 쓰는 포도들은 비용을 낮추기 위해 자동설비로 수확한다. 하지만 로스 바스코스의 ‘그랑리저브급’(고급) 와인은 손으로 직접 따서 프랑스산 라피트 오크통에서 숙성시킨다. 3~4월 말인 수확철엔 현지 농민을 비롯해 500여 명이 손으로 수확해 좋은 포도를 골라낸다. 이렇게 만들어진 와인 5만 병이 한국에 왔다. 라피트가 이마트 전용 라벨을 붙이고 블렌딩도 맞춤으로 했다. 이마트 20주년 특별 와인 ‘로스 바스코스 뀌베 20주년(이하 뀌베20)’이다. 다음 달 1일부터 이마트 전국 매장에서 판매된다.

 와이너리 샤토(게스트하우스) 2층에서 뀌베20을 시음했다. 병을 딴 후 1시간~1시간 반이 되자 와인향이 더욱 살아났다. 그간 로스 바스코스 그랑리저브급은 카베르네 소비뇽 100%로만 만들었다. 뀌베20은 수차례의 시음을 거쳐 카베르네 소비뇽 70%, 카르메네르 15%, 시라 10%, 말베크 5%의 새 블렌딩을 뽑아냈다. 가야르도 수석와인메이커는 “라피트 와인의 고급스러움을 살리면서 한국 소비자들이 더 쉽게 즐길 수 있는 와인을 만들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는 “시라를 섞어 과일향을 더하면서 카베르네 소비뇽의 맛을 끌어올렸고 아르헨티나에서 유명한 품종인 말베크를 더해 묵직함을 가미했다”고 설명했다.

 라피트는 그간 영국의 국립미술관이나 미국·독일에 프로젝트 형태로 맞춤 라벨 제품을 공급한 적이 있지만 아시아에는 이마트가 처음이다. 라피트사 이민우(40) 한국 대표는 “유럽에선 대형마트가 저가 이미지라 2011년 처음 이마트의 제안을 받은 라피트 본사가 여러모로 고민했다”고 말했다. 라피트 수출 책임자가 방한해 이마트 와인매장을 살펴보는 등 2년간의 협의 끝에 뀌베20을 공급하기로 결정했다. 이 대표는 “한국에서는 중산층 이상이 대형마트를 주로 찾는 점을 감안하면 로스 바스코스와 라피트의 와인을 널리 알리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마트가 이번에 들여온 5만 병은 일반적인 와인 수입량 5000병의 10배에 달한다. 이마트 주류담당 바이어 이형순(41) 부장은 “물량 자체도 많았고 이마트 와인 매장은 창고형인 유럽 대형마트와 달리 고급 와인이 많고 와인 전문가가 상주해 라피트의 고급 이미지에 손색없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설득했다”고 말했다. 대량 수입으로 운송료·물류비·보관비·세금 등을 낮추고 유통 단계를 줄인 덕에 싼 가격을 매길 수 있었다. 비슷한 품질의 칠레 와인이 4만9000원대인 데 비해 뀌베20은 2만5000원이다.

 한국무역협회 와인수입 통계에 따르면 칠레는 올 1~8월 한국에 와인을 가장 많이 수출했다. 이 기간 전체 수입물량 중 25.7%를 차지해 14%인 프랑스를 제쳤다. 가격 대비 품질이 뛰어나다는 인식 덕이다. 이마트가 로스 바스코스와 접촉한 것도 한국인이 선호하는 칠레 와인을 라피트 기술로 만든다는 점 때문이었다. 와인 업계 관계자는 “프랑스 보르도산과 버금가는 품질, 한국인이 좋아하는 소위 ‘진한 맛’, 발음하기 쉬운 이름 등이 칠레 와인이 인기를 끄는 비결”이라고 말했다.

콜차구아(칠레)=최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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