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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남과 북의 포로수용소(8)|박백 중위의 경우(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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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휴전협정에 따라 교환된 쌍방포로숫자를 보면 국군이 7천8백62명(유엔군 4천7백64명)인데 비해 괴뢰군은 6만4백49명(중공군 5천6백40명)이었고, 이보다 앞서 교환된 쌍방의 부상병포로는 국군이 4백61명에다 괴뢰군은 5천98명이었다. 이 숫자상에 나타난 쌍방의 포로비율은 무려 10대1이라는 엄청난 차를 보이고 있다. 휴전회담 때「유엔」군 측 대표는 적 측이 제시한 아군포로 명단 중에 누락된 5만 명의 소재를 밝히라고 추궁했으나 끝내 묵살되고 말았다(육본발행후방전사참고).
결국 북괴는 거의가 국군포로 인이 5만 명을 강제로 괴뢰군에 편입했거나 또는 학살한 게 틀림없었다.

<감시병 죽이고 총 갖고 탈출>
또한 굶주림과 질병과 중노동으로 수많은 포로가 죽은 것도 사실이었다. 이와 같은 모든 사실은 1950년 11월 초순에 중공군에 잡혀 괴뢰수용소를 전전하다가 휴전후인 1953년 8월5일에 송환된 박 백 중위의 증언을 통해 뚜렷이 밝혀지고 있다. 송환된 국군포로 중에서 박 백 중위만큼 가혹한 괴뢰수용소생활에서 살아남아 그때 체험을 소상히 기억하고있는 증인도 드물다.
▲박 백씨(당시 8사단16연대2대대수색중대부관=중위·예비역 대위·현 물망초화원경영·42)<50년 11월 초순에 희 천에서 구장으로 후퇴해 나오다가 중공군에 포로가 됐습니다. 중대장이 전사하고 내가 중대를 지휘, 저항하다가 나 자신도 부상을 하고 포로가 됐어요. 대원2명이 죽고, 3명이 다치고, 나머지 30명은 모두 잡혔어요. 다른데서 잡힌 70여명의 포로와 함께 1주일동안 중공군의 호송을 받으며 어느 산중의 화전민부락에 도착해서 북괴군에 인계됐어요. 오막살이에 분산 수용됐는데 나는 같은 중대의 최인홍 1등 중사, 박해구 2등 중사, 조봉구 1등 병과 한방에 들었어요. 이때까지 심문은 별로 없었어요.
우리 넷은 탈출을 결심했어요. 우리 방 앞에 감시병 한 명이 서있는데 밤에 잠깐자리를 뜬 사이에 조·최·박이 먼저 뛰어나가고 내가 마지막으로 나가려는데 감시병이 들어와 들고있던 호미로 찍어 죽였어요. 총을 뺏어 넷이 함께 밤새도록 걸었어요. 이렇게 산길을 타고 15일간을 죽을 고생을 하며 묘향산 밑까지는 무사히 내려갔는데 그만 거기서 괴뢰군에게 또 잡혔어요. 괴뢰군의 호송을 받으며 20이일동안 끌려간 곳이 바로 화풍광산의 임시 포로 수영 소예요. 5백 여명의 국군과 3백 여명의 미군포로가 먼저 와있습디다. 물론 우리와 미군은 분리해서 수용했어요. 국군포로들은 다른 부대 원으로 모두 모르는 사람들 이예요.
다행히 우리가 탈출할 때 괴뢰감시병 죽인 것은 감쪽같이 숨겼어요.

<전우 죽으면 옷 벗겨 입고>
화풍수용소에 한 달쯤 있다가 우 시로 이동했어요. 이때가 51년 1월이었는데 우 시 수용소에서는 발진「티푸스」등의 전염병과 영양실조로 수많은 포로가 죽어갔어요. 처음에는 한방에 20여명을 처넣어 누울 수도 없는데 며칠이 지나면 죽는 사람이 많아 자리가 넓어질 정도였으니까요. 음식은 하루에 두끼밖에 안 주는데 한끼에 강냉이 1백82알 정도에 부식은 소금뿐이에요. 옆자리에 있던 전우가 죽으면 그대로 들것에 실어다 호 속에 넣었어요. 죽은 사람의 옷은 벗겨 입었고요.
추워서 그렇게 할밖에 없었지요. 이때부터는 다른 생각은 아예 없고 오직 먹는 것만에 신경이 쏠립디다. 작업을 나가면 강냉이 알을 몇 개 더 줘서 다 죽어 가는 환자도 작업을 지원했어요. 작업이란 다른 게 아니라 시체를 들것으로 나르는 거예요. 작업에 나갔다가 그대로 기 진한 포로도 꽤있었어요.
아침에 괴뢰감시병이 점호를 할 때는 죽은 사람도 안 죽은 것으로 보고해서 밥을 더 타 먹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시체를 2, 3일씩 방안에 놔두고 점호 때는 벽에 기대 앉혀서 눈가림을 시켰어요. 나중에는 탄로가 났지 만 요. 중환자들도 자기급식을 절대로 동료에게 주는 일이 없어요. 내일이면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강냉이 덩이를 뭉쳐서 꼭 쥐고있어요.
죽어 가는 환자 옆에 바싹 붙어 앉았다가 숨이 떨어지면 얼른 뺏어먹곤 했어요. 몸에는 이가 득실거리는데 죽은 사람 몸에서는 한 홉 정도의 이가 기어 나오더군요. 환자는 대개 친구가 간호를 해주는데 이것도 급식을 좀 얻어먹으려는 속셈 때문이었지요. 발진「티푸스」에 걸린 환자들은 변소에 가서 그대로 쓰러지거나 목이 타니까 고드름을 따먹다가 넘어져 죽기도 했어요. 동상에 걸려 손가락이 그대로 떨어져 나가기도 합디다. 감각이 마비되니까 아프지도 않는가 봐요. 모든 후각이나 미각도 없으니까 옆에서 시체가 썩어가도 아무 냄새도 못 맡겠습디다.

<작업 나가 개구리 잡아먹고>
우 시 수용소에는 매일같이 포로가 이송돼오는데도 죽어 가는 사람이 많아 늘 8천명정도는 됐어요. 하루에 평균40∼50명씩 죽었고, 어떤 날은 1백 명도 죽었어요. 시체는 호 속에 다 그냥 쓸어 넣는데 한번은 내가 작업을 나가보니까 전날 갖다버린 시체 속에 눈을 뜨고 아직 살아 있는 자가 있어요. 결국 좀 있다가 눈을 감습디다. 나중에는 들것이 모자라 우마차로 시체를 날랐어요. 해동이 되니까 인근주민들이 항의소동을 벌었어요. 시체 썩는 냄새 때문에 못 견디겠다는 거지요. 내 친구 박해구, 조봉구도 여기서 죽었습니다. 봄이 됐을 때 우 시 수용소에는 포로가 3천명정도밖에 안 남았어요.
그러니까 5천 여명이 여기서 죽은 셈이죠. 4월에 우 시 수용소를 떠나 수풍발전소를 거쳐 천마광산수용소로 이동을 시킵디다. 여기서는 조밥을 주어서 급식사정은 좀 나아진 편이 예요.
그러나 신분조사를 본격적으로 합디다. 나는 끝까지 2등 병이라고 버텼지만 8사단5연대부연대장 박 중령과 노병렬 소령, 6사단의무부장 김 중령 등의 신분이 탄로가 났어요. 소위 자치제로 생활을 얽매고 주로 나무를 베는 작업을 시켰어요. 작업을 나가면 더덕도 캐먹고 개울에서 개구리도 잡아먹었어요. 나는 이때 가재를 잡아먹고 폐「디스토마」에 걸려 지금까지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우 시 수용소에서는 포로들은 대부분이 폐인이 되다시피 쇠약해서 작업도 못했어요.
우리 방에 함께 있던 한전 우가 과 식으로 즉사한 일도 있었고요. 5월1일 노동절을 축하한다고 개를 잡는데 이 친구가 경험이 있다고 뽑혀나갔어요. 개 잡아준 댓 가로 실컷 먹으라는 바람에 밥 네 사발에 다 비지 국을 세 그릇이나 퍼먹었대요. 굶주리다가 한꺼번에 콱 먹었으니 견디겠어요? 돌아와서 입에서「개스」를 뿜다가 죽습디다. 6월 중순에 포로 중에서 노력복구대원을 모집하더군요. 계급만 안주고 대우는 괴뢰병과 똑같이 해준다는 거예요.

<한달 작업대가 담배 한 갑 값,>
건강한 포로들은 대부분이 여기에 지원했어요. 우선 배고픔을 면해보자는 생각에서지요. 나도 지원했어요. 신검과 성분조사 등의 심사를 받고 합격자들을 모아 결단식을 했는데 우리부대는 980부대라고 하더군요.
분대장까지의 모든 지휘관은 괴뢰군이 맡고 제식훈련과 학습을 시킵디다. 정주로 이동했을 때인데 하루는 정치보위부소속의 대대장이 나를 부르더니 불온사상자를 색출해내는 끄나 불이 돼 달라는 거예요. 한가지 조건을 내걸고 응낙을 했어요. 모두들 이야기를 잘 안 하니 유도하기 위해 내가 불온한 발언을 해도 되겠느냐고 했더니 좋다는 겁니다.
이때 우리의 한달 노임이 50원인데「금강」담배 한 갑 값이 예요. 우리에게는 하루에 질이 나쁜 백두산담배 5개비씩을 배급했어요. 나는 이런 노임사정과 담배 질에 대해서 마구 불평을 퍼뜨렸지요. 그리고 저자들에게 반대하는 불온분자를 찾는 게 아니라 가장 동조하는 자를 골라서 대대정치장교에게 일러바쳤어요.
그러면 이자들이 붙들려가서 혼나고 돌아오면 태도가 1백80도 달라져요. 나는 이태화 김노수 강수세 오정웅 같은 동조자들을 허위 밀고했는데 나중에 이분들은 완전히 우리편이 됐어요. 나는 이들과 또 탈출계획을 짰어요. 6월 하순에「해방전사」(포로노력부내명칭) 복장 그대로 밤에 부대를 이탈하여 청천강을 건넜는데 거기서 또 잡혔어요. 다시 부대로 끌려가서 정치대대장한테 배신했다고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중위신분탄로나 고문 받아>
나는 주모자라고 혼자 방공호 속에 분리 수용되고 밥과 물도 제대로 안 주더니 1주일만에 함께 탈출했던 4명과같이 있게 합디다. 5명이 10여일 동안 고문과 심문을 받다가 풀려서 원 부대로 돌아갔어요. 나는 이때까지도 내 신분을 속이고 2등 병 행세를 했어요. 그런데 얼마 안 있다가 각 부대대항운동회를 열었어요. 여기서 우연히 우리국군8사단에서 서무를 보던 부산D대 출신 김이란 친구를 만났어요. 이자는 6회25전에 이미 남로당에 입당한 적색분자였어요. 이자가 내 신분을 낱낱이 일러바쳤어요. 이래서 또 잡혀서 2주일동안 고문과 심문을 받고 앞으로의「반동」행위에 대해서는 어떤 처벌도 감수한다는 각서를 쓰고 겨우 풀러 나왔습니다. ·

<주요일지>(1950년 12월3, 4, 5일)
※12월3일▲중공군 6개 사단 미 해병대 포위▲「유엔」군, 순천·숙 천서 철수▲국회, 긴박한 전세로 비상소집▲신 국방,「유엔」에 원폭사용을 요청▲「애틀리」영 수상 방미
※12월4일▲「맨」원수 중공군 백만이 북한에 집결 언명▲중공군 함흥 원산에 중압▲평양시의 모든 행정군사기관철수▲중공의 한국침략규탄 6개국결의안총회 제출▲길 전 수상, 일본은 한국에 의용군파견 불허언명▲「트루먼」대통령 긴급 각의 소집▲「트루먼」-「애틀리」회담 개시
※12월5일▲중공군 평양침입▲미군 기 24시간출격▲아세아·「아랍」13개국, 중공은 38선이 남에 진격 말라고 요청▲인도, 한국전에 원폭사용 불찬 ▲「트루먼」-「애틀리」공동성명▲미 해군성 대변인,「유엔」군의 한국철수에 만반대책 언명
※정정=본 연재 214회 본문의 포로수용소소재지명중「벽동」은「벽달」의 오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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