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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일대 주은래의 얼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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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설득의 명수」 「수퍼맨」 「고급흉물」…. 역사상 주은래 만큼 다양한 질과 풍부한 양의 별명을 들었던 사람도 드물다. 그러나 최고와 최저가 뒤섞인 이 별명들은 그의 「맹렬한 인생역정」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 그의 73년간의 발자취를 통해 「주은래판 천의, 얼굴」을 더듬어본다.
주은래가 태어난 것은 「홍콩」의 신계가 영국에 조차되던 해인 1898년이었다. 중국대륙이 구주열강들의 등쌀에 빈사상태에 빠지던 때에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강소성 준 안에 있던 그의 집은 부유한 사대부가문이었으므로 생활경험이 공산주의를 만들만한 소지는 희박했다. 열 네살 나던 해에 천진의 남개중학에 입학, 졸업 후 즉시 일본 유학 길에 오른다. 당시에는 예비「인텔리」들의 일본유학이 대유행이었다. 손문·장개석 등도 모두 일본유학생출신인 것이다.
「와세다」대와 일본대학에서 약1년반동안 청강한 다음 귀국, 남개대학에 입학한다. 이것이 1917년. 대학에서 그는 학생회의 기관지를 주관하면서 문명을 날렸다. 노신 등 개화문학가들에 심취하여 한때는 자신의 장래를 「문학가」에 두기도 했다.
이러한 꿈이 혁명가 쪽으로 기운 것은 19년의 유명한 「5·4운동」때부터. 천진에서 학생들을 조직, 진두지휘를 맡았던 그는 그해 말에 투옥되어 반년간의 옥살이를 치른다.
그러나 이 옥중생활에서 현재의 부인 등영초를 사귀게된다. 당시 천진여자사범학교 학생이던 등 역시 5·4 운동관계로 투옥되어 있었으므로 둘은 말하자면 감옥동기생. 이들은 5년 뒤 주가 26세 되던 해에 광동에서 결혼한다.
출옥후 주는 「성사」라는 급진적 사회주의단체를 조직하나 별 성과를 못 거두고 당시 유행이던 「프랑스」 유학 길에 오른다. 「근공검학」이라고 불리던 이 구주 유학은 일종의 고학으로서 당시의 중국청년들에게는 최대의 꿈이기도 했다. 이들은 「그룹」을 지어 선편으로 갔는데 주가 참가한 것은 제2진. 이입삼·채화삼 등 후의 중국공산당 「멤버」들은 거의 이 유학단 출신이며 모택동 역시 여기에 참가하려고 상해까지 갔었으나 출국직전에 포기한다.
「프랑스」에서 2년을 보내는 동안 주는 공산주의연구에 골몰하는 한편 21년 봄 채화삼·이입삼 등과 함께 「중국공산주의소년단」을 조직한다. 이것은 진독수·이대쇠 등이 본국에서 공산당을 창당한 시기보다 몇 달 앞선 것이었다.
2년간의 「파리」생활 뒤에 찾아간 곳은 「베를린」. 주는 여기에서 주덕과 사귀며 약1년간 공산주의연구를 한다. 공산주의자로서의 사상적 기틀을 마련한 그는 「런던」 「모스크바」를 거쳐 귀국, 구주에서 보낸 3년간은 일본생활 1년반과 함께 그의 사고방식에 「상식」이 작용할 수 있는 밑받침으로 된다.
주가 귀국한, 24년은 소위 제1차 국공합작으로 중국공산당이 손문의 국민당에 흡수되던 때. 국민당의근거지인 광동으로 내려간 그는 장개석이 교장으로 있던 황포군관학교 정치부주임대리로 임명된다. 당시의 주임은 후에 일본의 앞잡이로 전락한 왕조명(왕정위). 당시 주의 나이는 26세, 파격적인 출세였다.
주의 단정한 외모와 예의바른 태도는 장개석에게 상당 호감을 줬던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손문의 사후, 소위 「중산함 사건」이 터졌을 때 장은 다른 공산주의자들과는 달리 주를 관대하게 봐줬던 것이다.
황포군관학교에 있는 동안 주는 전략 및 전술에 관 군사적 지식을 익힌다. 스승은 소련공산당이 손문에게 보냈던 「가론」. 이때에 배운 지식과 그의 천부적 조직능력은 27년 상해 「스트라이크」에서 발휘된다.
즉 27년 장개석이 1차 북벌에 오를 때 주가 상해에서 「장지지 폭동」을 일으키도록 명령받은 것이다. 주는 불과 두달 사이에 60만의 노동자를 조직, 5천명의 무장노동자와 8만명의 노동자경찰대를 이용해서 장개석군이 들어오기도 전에 인민정부를 수립한다. 그러나 이 기적을 낳은 능력 때문에 주는 장의 미움을 사게되며 장은 인민정부가 공산주의적 색채를 띠었다는 이유로 4·12「쿠데타」를 일으킨다.
주는 간신히 상해를 탈출, 무한으로 도망치자 장은 궐석재판에서 주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그러나 무한에서 곧 남차으로 옮긴 주는 그곳 공산당지도자들과 합류, 27년8월1일의 유명한 남창폭동을 일으킨다. 중공군은 바로 이날을 건군기념일로 삼고있다.
이와 같은 활약이 높이 평가되어 이해에 열린 중공당 5전 대회에서는 중앙위위원으로 선출되며 이듬해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6회 「코민테른」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출된다. 당시의 나이 30세.
그 뒤 광동 「코뮨」·추수폭동 등 거의 모든 폭력혁명의 시도에 참가하다가 31년에는 주덕이 이끄는 「빨치산」의 총 정치위원이 되어 강서 「소비에트」를 지도한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그의 혁명노선은 소위 「이입삼」노선을 따른 것. 즉 「마르크스」나 「레닌」의 주장대로 혁명의 전위는 도시 노동자들이며 농민은 『본질적으로 보수·반동에 속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노선에서 탈피한 것은 33년 모택동의 「정강산투쟁」에 합류하면서부터.
주덕과 함께 모의 휘하에 들어간 그는 종래의 「노동자 중심 노선」에서 「농민을 대 후방으로 한 게릴라전」으로 완전히 방식을 변경했다.
주의 모 노선에 대한 확신이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 것은 35년의 준의회의 때. 대장정이라는 참담한 패배의 책임과 앞으로의 투쟁방안을 두고 열렸던 이 확대간부회의에서 그는 결연히 모의 유격전술을 옹호하면서 진방헌 등의 숙청에 앞장섰던 것이다. 말하자면 모택동의 첫 번째 당내투쟁에서 주는 일등공신이 된 셈이다. 당시의 나이 37세, 직책은 중앙군사혁명위부주석(주석은 주덕)이었다.
대장정이후가 소위 「연안시절」. 일본군보다 공산군을 먼저 박살내겠다는 장개석 총통의 방침 때문에 한마디로 『죽을 지경』이었던 때였다. 당시의 사진을 보면 모·주·주 등 지도자들의 얼굴은 초라한 인민복 때문에 더 그렇게 보였겠지만 모두 영양실조에 걸린 모습이다. 「체인·스모커」였던 모가 담배 떨어질까 봐 걱정했었다니 먹을 것인들 풍부할리가 없었을 것이다.
바로 이때에 모·주 등을 구출해준 것이 36년의 서안사건. 만주 군벌 장학량이 총공격에 관한 작전회의를 열려고 온 장 총통을 감금해버린 사건이었다. 장의 요구는 모택동의 「항일민족전선론」에 따라 모·장이 연합해서 일본부터 쳐부수자는 것.
주는 장 총통이 감금 돼 있는 노시로 가서 제2차 국공합작을 성공시켰다. 장학량을 구스르고 『죽음을 각오한』 장을 설득한 그의 수완은 「담판선생」이란 별명까지 낳았다.
어쨌든 준의회의에서 모의 당내지도권을 확립시킨 뒤에 이번에는 궤멸직전의 공산군에 활로를 열어준 것이다.
주는 45년 일본이 항복한 뒤에도 또 한번 공산군을 구출한다. 종전즉시 공산당에 총구를 돌리려는 장 총통을 설득, 쌍십협정, 정전 3인위 등으로 시간을 벌어준 것이다. 이기간 공산군은 만주로 집결, 소련이 무장 해제한 일본군 무기를 인수받음으로써 완전해 전력을 가다듬게 되었다.
중공정권수립후의 그의 직책은 수상 겸 외상. 내치와 외교를 한 손에 쥐고서 『하루 다섯 시간 밖에 안자는』(「마크· 게인」기) 강행군을 계속해왔다. 외상직은 57년 진의에게 물려줬으나 중요한 결정은 언제나 스스로 한다.
50년 한국전선이 압록강으로 확대되자 그는 주덕·고강 등 신중파를 누르고 모를 설득, 파병에 앞장섰다. 그러나 휴전회담을 가장 먼저 입에 올리고 포로문제에서 양보를 한 것도 바로 그였다.
외교가로서 뿐만 아니라 행정가로서의 그의 능력도 거의 독보적인 것이다. 문혁파동의 국무원 파급을 예방한 그의 판단력은 구전대회와 함께 중공의 경제가 즉시 호전되는데 원동력구실을 한 것이다.
『술 한 방울 못하는 풍운아』는 중공지도자들 중 한번밖에 결혼 안한 유일한 사나이로도 유명하다. 모택동의 경우 강청과의 4번째 결혼은 대장정의 비극 속에서 했으며 당이 허락하지 않자 『혁명을 그만두겠다』는 추태(?)까지 부렸었다. 감옥동기생이었던 부인은 현재 중공당 중앙위원. 주의 유일한 취미인 탁구상대이기도하다. <홍사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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