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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제15화>자동차 반세기(15)|서용기<제자는 필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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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운수 업계의 부침>
6·25 사변이 터졌을 때 나는 「버스」 2대에 가축들을 싣고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2대의 「버스」는 나의 전 재산이나 다름없었다. 부산 서면에 정착을 하고 보니 먹고 살길이라곤 역시 운수업 밖에 없었다. 단 2대의 「버스」로 회사를 차리고자 마음먹었을 때 서울서 운수업을 하던 친구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홍순우(현 성남 운수 대표)·홍건표·문경신씨 등이었다. 그들도 나처럼 피난 올 때 「버스」 한 두 대를 가지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버스」 64대를 모았다. 「서울 버스 공사」라는 것을 그야말로 순수한 피난민들끼리 만들었던 것이다.
그때 부산에는 신흥 「버스」와 부산 「버스」 등이 판을 칠 때였다. 그리고 쓸 만한 화물「트럭」은 사변 초기에 징발 당했다.
내가 지금도 자부심을 갖고 내세울 수 있는 것은 그 당시 피난민을 위한 무임 승차권 5백장을 만들어 그들이 먹고사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을 줬다는 것이다.
사실 그때야말로 해방과 함께 다시 싹터오던 자동차 업계가 두 번째 전멸 상태로 빠졌다.
총 차량의 75%인 1만2천여 대가 피해를 보았다. 승용차는 77%, 「버스」 67%, 화물차 66%, 소형 및 특수 차량 78%가 풍비 박산 되어버린 것이다.
정말 원조 자금으로 자동차 8백82대를 들여오지 않았다면 특히 「버스」 업계는 재기 불능의 상태에 놓일 뻔했다.
9·28 수복은 서울 피난민들에게 희망을 던져 줬다. 내가 대표로 되어 있던 서울 「버스」 공사의 차는 한강의 도강이 허용되지 않았던 때 영등포까지 진출하여 피난민들이 서울의 자기 집에서 쓸 만한 물건을 갖고 나와 부산에서 팔 수 있도록 큰 힘이 되어 줬다.
지금 생각하면 무척 무모할 만큼 운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해 10월7일 서울 수복이 된 후 우리들이 할 일은 너무 많았다.
이른바 「서울특별시 운수 부흥 대책 협의회」라는 것을 만들어 식량·땔감 등 생활 필수품의 수송을 무료로 전담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10월20일께 청량리∼한강교, 마포∼돈암동 사이의 「버스」 운행을 재개했다. 그렇지만 그것도 한때였다. 곧 1·4 후퇴가 있어 서울의 운수 업자들 온 차를 전부 갖고 부산·대구 등지로 다시 피난을 갔다.
고달픈 나날이었다.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1953년의 일이다. 전국 자동차 운송 사업 조합 연합회를 결성하여 업자 상호의 살아갈 길을 모색했다.
물론 교통부 당국의 종용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당시 육운국장 진병호씨, 공로 과장 구본준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창경원에서 결성식을 가졌다. 아마 그 자리에는 정인조 김윤기 이동근 남송학 최승렬 허문 문갑동 남상학 박노식씨(현「택시」사업 조합 연합 회장) 등이 참석한 것으로 기억한다.
또 그해 화물 자동차 조합이 생겼는데 그때 지금의 한진 재벌 총수인 조중훈씨가 경기 대표로 처음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으로 안다.
이종림 교통부 장관 때의 일이다. 전북의 최승렬씨와 김선주(전남) 김교빈(부산) 박성동(경북) 박선인(충남) 박수행(충북) 김옥현(제주) 이동근(서울) 구자련(경기) 나천만(강원)씨 등이 그 당시 대표적인 운수 업자들이었다.
그 무렵의 자동차 판매업은 화신 산업의 박흥식씨가 「포드」 대리점을 열었다. 박씨가 대리점을 할 때 「버클리」라는 미국인이 대리상으로 서로 경합 중이었는데 나와 김승문씨가 가운데 나서 박씨에게 한국 판매권을 독점케 한 것으로 기억된다. 박인천씨 등이 운수업계의 거물로 등장한 것도 그때의 일이다.
그런 실정 속에서 우리 나라에서는 최초로 국산 자동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1955년8월이었다. 최무성씨의 「시발」자동차 회사가 4기통 짜리 「시발·엔진」을 제작하여 9월에 「지프」형 승용차를 만든 것이다.
그런 상태가 5∼6년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1962년 새나라 자동차 회사가 「새나라」 1천7백10대를 조립하여 시판했다.
이웃 일본의 경우, 1926년에 「요꼬하마」에 조립 공장이 생긴 것을 비교하면 무려 36년이나 뒤진 셈이지만 우리들의 처지로선 그나마 다행스런 것이었다. 지금 신진 자동차의 김제원·김창원 형제는 부산에서 신진 공업사라는 간판 아래 손으로 두드려서 만든 「버스」 차체 등을 만들 때였다. 김씨 형제가 63년1월4일 국내 최초로 「마이크로버스」를 생산했고 그해 11월5일에는 신성호라는 국산 자동차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65년8월7일부터는 대형「버스」도 만들기 시작했다. 66년1월 신진 자동차 공업 주식회사가 정식으로 설립되고 일본 「도요다」와 제휴하여 「코로나」를 조립하기 시작했고 첫해 3천6백대를 시중에 내놓았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때부터 우리 나라 자동차 업계가 정상 궤도에 오른 것이다. 지금은 국산화 율이 52%라고 큰소리치는 이유도 그때부터 싹튼 것이다.
68년11월 현대 자동차의 「코티나」, 70년4월 아세아 자동차의 「피아트」가 나오기 시작하여 이제 자동차 업계는 삼국시대를 맞은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도와주신 여러분들에게 감사드리고 특히 김연수씨와 김성수씨 일을 착각했던 것에 대해 사과 드린다.<끝><다음 번은 6·25 동란 중 한·미 합동으로 특별 정보 활동을 편 6006부대 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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