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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제15화>자동차 반세기|서용기(제자는 필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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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05면

1927년께의 일이라고 기억된다.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운수행정당국을 비판하는 운수업자들의 공개성토대회가 열렸다.
철도국이 역 주변의 화물운송업자를 대폭 경비하여 일역일업자 주의 원칙을 세우자 군소 화물 운송업자들이 들고일어난 것이다.
사실 그때까지의 우리 나라 화물운송업, 즉 소 운송업은 업자들의 난립으로 극히 무질서할 때였다. 경성 공회당에서 일역일업자 반대대회가 열린 날은 큰 구경거리였다. 5만여 명의「비라」가 살포되고 공개장이 나도는 등 그 분위기는 살벌하기조차 했다.
모여든 5백여 명이 저마다 열을 올리며 떠들어대는 집회분위기는 시장 바닥보다 더 소란스러웠다고 기억한다.
그들이 한결같이 내세운 주장은 한마디로 일역일업자 원칙을 철회하라는 것이었다. 한 업자에게 운송권을 독점시켜주려는 의도는 산업발달의 원동력인 운수업의 발전에 큰 장애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1905년 1월 경부선 개통과 함께 일본의 내국통운(지금의 일본통운전신)이 경성·부산·인천에 지점을 열고 기틀을 잡은 화물 운송업계의 큰 시련이었다.
그 무렵 우리 나라 화물 운송업계의 판도는 군소 재래업자와 내국통운 및 1918년께 진출한 일본운송의 세 갈래로 나누어져 있었다.
특히 일본운송의 진출은 내국통운에 큰 위협적인 존재로 등장했지만 행정당국은 어디까지나 운송업의 자유영업주의를 고수할 때였다.
단지 1919년 6월인가 운송취급인의 공인규정을 만들어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최초의 화물 운송영업이 있은 후 10년 가까운 동안은 군웅할거 시대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런 판국에 철도국이 일역일업자 원칙을 내세워 전국의 화물운송업자를 통합시키려 들었으나 그 반발이야말로 거센 것이었다.
또 대 운송업자인 통운과 일본운송은 제각기 자기회사계열의 군소 업자를 충동질하여 한편으로는 일역일 업자 원칙반대운동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자기세력권을 확장하여 독점체제를 굳히는 방법을 썼다. 따지고 보면 경성집회도 그들 양대 회사의 책동전에 중소업자들이 놀아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총독부 철도국의 방침은 의외로 강경했다. 그렇게되니 일부 약삭빠른 업자들이, 주동이 되어 운송합동 유지회를 조직하기에 이르렀고, 한편에선 매일같이 합동 반대연설회가 열렸다.
반대파에는 군소 업자들뿐만 아니라 상공연합회·곡물협회·지상연맹 등이 하주를 대표해서 보조를 맞춘 것으로 안다.
그때 조정에 나선 사람들이 있었다는 경성상업회의소 회두였던 도변정일낭과 조선식 산은행두취인 유하광풍 두 사람이었다. 그러나 팽팽한 대립만 있었을 뿐 이렇다할 결론을 얻지 못한 채 2년이 지났다. 그 동안 통운과 일본운송의 피나는 싸움이 진행되어 일운 측에서 조선철수를 하게되고 자연히 통운이 그 싸움에서 이기자. 그렇게도 반대하던 군소 업자들도 체념해 버렸다.
1930년4월 자본금 1백만원의 조선 운송주식회사가 창립을 보게된 것이다. 우리 나라 화물운송업이 그래도 본궤도에 오른 것은 그러한 과정을 거친 후부터였다고 생각된다.
우리가 흔히들「마루보시」라고 불렀고, 지금도 그렇게 기억하고 운송업체가 바로 조선운송이었고 「마루보시」는 그 회사 기호였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조선「트럭」, 남선운수, 전북「트럭」, 영흥자동차, 충북「트럭」, 남진자동차, 부산「트럭」, 전남운송, 평남육군회사도 조선운수의 통제를 받았던 것 같다.
그런 체제가 1937년까지 계속되었다.
그 당시「트럭」운전사 가운데 최연소자가 21세의 송 재별이었다고 기억한다. 송씨는 당시 세도 집안인 송병준 백작의 손자로 12세 때부터 운전을 배우기 시작하여 만20세 때 운전면허를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도 한국은행에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있다.
그는 해방될 때까지 함경도지방에서「트럭」영업을 하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에 차를 빼앗기고 단신 월남했다고 들었다.
아마 그가 12세 때 일 것이다. 고향인 용인에서 자기 집 자가용을 운전하고 지서 앞을 지나간 것이 용인군 전체에 비상을 걸게 만든 일화는 유명했다. 하도 키가 작은아이가 차를 운전하고 가니 밖에서 볼 때 빈차가 그냥 굴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마침 지서순경이 빈차가 저절로 굴러가기는 하는데 속도가 무척 빠른데다 골목길을 잘 돌아나가자 기겁을 하고 본서에 연락해 버린 것이다. 용인경찰서의 전 경찰력과 헌병이 출동하여 잡고 보니 꼬마가 운전을 하고있는 것이 아닌가. 호통을 치려던 서장이 아무래도 미심쩍어 꼬마의 내력을 물어보니 세도 당당한 송 백작의 집안이라 아무소리 못하고 돌아섰다는 이야기는 수원·경성지방에선 당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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