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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귀환 중의 손치규씨 고발수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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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사할린」은 겨울이 길고 여름이 짧다. 겨울에는 보통 하오 5시만 되면 어두웠는데 긴긴밤을 새우는 일이 고통스러웠다.
밤마다 고향의 처자생각이 떠오르고 어떻게 하면 빠져 나갈까하고 궁리했지만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큰아들 종운이 일본여성과 결혼한 실마리가 된 것이다.
종운은 일본여성과 결혼하고 성도 일본식으로 개명한 뒤 일본정부에서 인수하는 형식을 통해 1965년 마침내 사지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빠져 나온 사람은 통틀어 2천5백명쯤 된다.

<여행세 4백 루블>
그런데 소련정부는 「사할린」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돈(재산)을 못 가지고 나가도록 하기 위해 여행세라는 것을 부과했는데 1인당 2백「루블」정도였다가 차차 올라 내가 나올 때는 4백「루블」이나 내라고 했다. 물론 나에게는 이렇게 큰 돈이 없어서 4촌인 영규씨 등이 조금씩 거누어 마련해 주었다.
소련사람들은 한국인들이 먹지 않고 입지 않고 푼푼이 돈을 모아 몇백 「루블」이고 저축할만하면 화폐개혁을 실시하여 모두 긁어갔다. 나는 두 번 겪었는데 그때마다 돈이 10분의 1로 줄었고 은행에 저금한 것도 아예 10분의 1로 고쳐주어 만져 보지도 못하고 다 빼앗기곤 했다.
60년에 종운이가 빠져나간 뒤 내 생활은 극히 비참했다. 그전에도 자취생활을 했지만 빨래와 밥짓는 것, 그리고 고향생각에 사로 잡혀 밤을 새우기가 도무지 고통스러웠다.

<아리랑 듣고 눈물>
이웃에 사는 박시기씨가 「라디오」를 하나 갖고 있어서 밤에는 이것을 듣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중앙방송국의 국제방송이 들렸는데 나라안 소식도 중요했지만 「아리랑」「양산도」등 민요가 나올 때마다 저절로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박을 길이 없었다.
무국적자로 된 사람은 젊은 사람이라야 50대이지만 외사촌이 사는 지방에선 안타까운 나머지 이들이 식초를 마시고 자살을 기도했고 그러나 번번이 미수에 그친 일이 있었다.
자살하려야 극약을 구할 수 없었고 목매달아 죽거나 물에 투신하는 길밖에 없었다. 고작 얻을 수 있는 것은 식초뿐이었기 때문이다.

<감자·김치로 연명>
소련에서는 모든 물건이 다 귀했다. 시장에 가면 빵 같은 먹을 것은 팔고 있었지만 생활소비품은 휴지까지도 부족했다.
장화 같은 것도 없었고 붓글씨 배우는데 쓰는 반지조차도 없었다.
나는 떠나오기 얼마 전까지 감자를 쪄서 김치와 같이 먹는 식사를 계속했다. 이것 밖에 구하기 쉬운 것이 없었다.
그러나 김치는 무우·배추를 그냥 소금에 절인 것이지 양념은 없었다. 「사할린」에서는 고추는 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사할린」에서는 물건을 살 때 가져가는 것은 사는 사람의 책임이다. 예를 들면 밀가루를 반 부대 살때는 사는 쪽에서 부대나 양재기를 준비해야 되었다.
물건을 포장해 주는 일은 절대로 없었는데 종이가 모자라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워낙 나이가 많아 2세들의 회유대상에서 빠졌지만 50∼60세 되는 사람들은 심한 고통을 받았다. 2세들이 찾아와서는 『왜 북한국적을 안 얻느냐』고 윽박지르고 비위를 거슬리게 거절하면 무슨 구실을 붙여서라도 직장에서 내좇곤 했다.
그런데 소련정부는 처음에는 북한국적을 가진 사람이 소련귀화를 원하면 받아주었으나 최근에는 이것을 거절하고 있어서 사람대접은 안 하면서 일만 시키려는 본성을 드러내 놓고 있다.

<감격 어린 태극기>
나는 어떻게 된 것인지 잘 모르지만 일본 청삼에 있는 아들과 박노학씨가 힘을 써서 일본정부가 인수하는 것으로 하여 송환되었다고 한다. 떠나기 10일 전까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소련의 동서기가 4백「루블」을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일본돈 4백원인 줄 알았더니「루블」이라고 하여 깜짝 놀라고 또 이 돈이 없어 절차를 못 밟았다.
결국 친지와 동생들의 기부형식으로 4백「루블」을 마련하여 죽음의 땅을 벗어났지만 아직 거기에는 고생하는 내 혈육과 동포가 남아 있다.
곧 데려오지 않으면 늙어 죽고 병들어 죽고 견디다 못해 자살하여 아무도 모르게 사라질 것이다.
내가 나올 때 짐을 챙기니 26년 동안에 번 재산이 고작 15kg의 고리짝 하나도 차지 않았다. 헌옷가지 뿐이다. 이웃에 살던 김관웅씨 (제주사람) 가 일본에 가면 딸에게 전해 달라고 하며 부대자루에 든 짐을 맡겨 주었다. 그러나 배를 탈 때까지 정말 여기를 빠져나가는지 믿어지지 않았고 배를 타고서야 한숨 놓았다.
「요꼬하마」에 도착했을 때 나는 아들이 와있는 것을 보고 눈을 의심했다가 정말 감격적으로 포옹했다.
26년만에 태극기를 보고 우리말도 하며 실컷 울었다.
이제 늙고 피곤하여 뜻 있는 일은 못하겠지만 동포들의 참상을 낱낱이 알려 하루빨리 구출하는데 이바지하는 것만이 내 일이다. <끝> 【손치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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