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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날은 깨어 있을 때만 찾아올지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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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6호 28면

존 업다이크(John Updike, 1932~2009) 미국의 소도시에서 살아가는 중산층의 삶에 밀착한 작품을 주로 썼다. 소설과 시, 에세이, 비평 등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60권이 넘는 책을 출간했다. 『달려라, 토끼』를 시작으로 『돌아온 토끼』 『토끼는 부자다』 『토끼 잠들다』까지 10년 주기로 발표한 토끼 4부작이 대표작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을 읽는다. 수없이 접혀 있는 책장(冊張)을 하나씩 펼쳐가다 눈이 딱 멈춘다. “왜 우리는 이렇게 쫓기듯이 인생을 낭비해가며 살아야 하는가?”

박정태의 고전 속 불멸의 문장과 작가 <46>『달려라, 토끼』와 존 업다이크

소로 이 친구, 참 매력적이다. 앞쪽으로 다시 책장을 넘긴다. “사람들은 대부분 평온한 절망(quiet desperation) 속에서 살아간다.” 그래, 맞다. 늘 정신없이 바쁜 일상, 어딘가로 탈출하고 일탈하고 싶지만 어느새 익숙해져 그냥 살아간다. 소로는 그것을 꿰뚫어 본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람들은 더 세게, 더 빨리, 더 열심히 달린다. 그리고 『월든』이 출간된 지 106년이 지난 1960년에 하버드 출신의 신예작가 존 업다이크가 『달려라, 토끼(Rabbit, Run)』를 발표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대학 선배 소로가 월든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살기 시작했을 때와 같았는데, 작품 속 주인공 래빗도 그 나이다.

1950년대 필라델피아 인근의 소도시 브루어에서 동네 주방용품점을 돌며 신제품을 선전하고 다니는 세일즈맨 해리 앵스트롬. 그는 래빗이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고등학교 시절 잘나가는 농구선수였지만 지금은 골목길에서 아이들과 섞여 공을 던지는 신세다. 그는 그 과정을 잘 안다.

“조금씩 올라가다가 꼭대기에 닿으면 모두 환호한다. 눈에 땀이 들어가 앞은 잘 보이지 않고, 주위에서 소용돌이치는 소음에 몸이 위로 올라가는 듯한 기분이다. 그러다 퇴장한다. 처음에는 다들 기억해준다. 기분이 좋다. 그러다 마침내 이런 아이들에게 하늘 한 조각에 불과한 존재가 되고 만다. 아이들은 그를 잊은 게 아니다. 더 나쁘다. 들어본 적도 없는 것이다.”

그는 아직도 일류 농구선수였던 한때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지만 지금은 모든 게 이류다. 특히 아내 재니스와의 관계가 그런데, 재니스는 하루 종일 텔레비전 앞에 붙어사는 알코올 중독자다. 그는 목사에게 말한다. “어떤 것에, 그게 뭐가 되었든, 어떤 분야에서 일류가 되면 이류가 되는 게 뭔지 감이 좀 잡히는 것 같아요.”

그는 결국 임신 중인 아내와 두 살 된 아들을 버려둔 채 집을 나간다. 직장도 팽개치고 고교시절 농구 코치가 소개해준 여자 루스와 동거한다. 특별한 가출 동기는 없다. 그냥 아내가 담배를 한 갑 사다 달라고 했을 뿐이다.

“나는 저 안에 풀로 붙어 있는 것 같았어요. 수많은 망가진 장난감이며 빈 잔과 함께 말이에요. 텔레비전은 꺼질 줄 모르고, 빠져나갈 길은 보이지 않고. 그러다 갑자기 빠져나가는 게 사실 얼마나 쉬운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냥 걸어나가면 되니까. 젠장, 과연 쉽더군요.”

하지만 그렇게 달리고 또 달려도 영원히 도망칠 수는 없다. 아내가 딸을 출산하던 날 그는 집으로 돌아간다. 재니스도 술을 끊겠다고 결심하고, 장인은 그에게 새 직장을 구해 준다. 그런데 그는 며칠 만에 다시 도망친다. 그 바람에 아내는 술을 마시고 실수로 딸을 목욕물에 빠뜨린다. 혼절한 아내 곁으로 돌아온 그에게 장인은 이야기한다.

“인생은 계속되어야 하네. 인생은 계속되어야 해. 우리에게 남은 것을 가지고 계속 나아가야 해.”

하지만 그는 어린 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또다시 도망친다. 그리고 찾아간 루스, 그녀는 그에게 임신 사실을 알린다. 그는 아이를 낳으라고는 하지만, 부인과 이혼을 하든지 자신을 잊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루스의 재촉에는 모르겠다는 말밖에 할 수 없다.

“모르겠어. 그는 루스에게 계속 그렇게 말했다. 그는 모른다. 뭘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무슨 일이 벌어질지. 그가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무한히 작게, 잡는 것이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 같다. 그 작음이 광대함처럼 그를 채운다. 상대편이 그가 잘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수비 두 명을 붙이는 바람에 어느 쪽으로 돌든 둘 중 한 명과는 부딪치게 되어 있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패스하는 것밖에 없던 때와 비슷하다.”

제목처럼 래빗은 무조건 열심히 달리지만 목적지가 없다. 욕망은 있지만 꿈이 없는 것이다. 탈출하고는 싶은데 어디로 가고 싶은지 알지 못한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목표의식 결여증후군쯤 될 것 같다.

계속된 일탈과 불안의 이면에는 알 수도 없고 그래서 채울 수도 없는 삶의 욕망, 영혼의 갈증이 숨어 있겠지만 해답은 없다. 너무 무책임한 것일 수도 있고, 스스로 자신이 무가치한 존재라고 느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혹시 그에게 희망은 없었을까? 그래서 다시 처음부터 읽는다. 동네 아이들과 2대5로 농구를 한 다음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던 래빗은 새로운 가능성을 맛본다. 그래서 담뱃갑을 꺼내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자족감에 윗입술이 슬며시 올라간다. “3월이다. 사랑이 공기를 가볍게 만든다. 모든 것이 새 출발을 하고 있다.”

평온한 절망 대신 선택한 불안한 새 출발, 그렇게 자꾸 달리기만 하는 래빗에게 나는 소로의 말을 들려주고 싶다. 새로운 날은 우리가 깨어 있을 때만 찾아온다고.



박정태씨는 고려대 경제학과를 나와 서울경제신문, 한국일보 기자를 지냈다. 출판사 굿모닝북스 대표이며 북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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