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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공용 발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현대판 「로빈슨·크루소」의 소설을 쓰고 싶어하는 미국 작가가 있었다. 무대는 한국 휴전선의 완충지대. 한 비행사가 난기류로 인해 휴전 선상에 있게된다. 다행히도 포화를 면하고 완충지대에 낙하한다. 여기야말로 백색 지대이다. 모든 조건에서 해방된 「나」와 「자연」이 있을 뿐이다. 『그 후를 어떻게 한담?』 그 작가는 물었다. 물론 그는 이쪽의 정치적 해답을 기대하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높은 「인간 조건」의 차원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와는 아주 대조적인 상황이 있다. 이른바 비무장 지대인 DMZ의 공동 영농과 같은 경우이다. 저쪽의 민간인과 공동으로 이 완충지대에서 농사도 짓고, 공원도 개발한다는 가정이다. 퍽 「로맨틱」하다. 함께 모를 심다가 점심 시간이라도 되면 막걸리 잔도 권하며 담소한다. 이것은 정치적 동물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한 동족으로, 아니 그런 감정이 아니라면 「호모·사피엔스」의 심정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또 이런 장면도 생각할 수 있다. 남북간의 유일한 대화구인 판문점에서 영어와 한국말이 아닌, 한국말만으로 우리의 정치 환경·생존 환경 등을 얘기하는 경우이다.
말하자면 이런 동화적 환상을 자아내게 하는 발언들이 요즘 나오고 있다. 한 미국장성은 바로 비무장지대의 긴장 완화와 곁들여, 정전위 수석 대표의 한국인 교체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그 발설자의 신분이 미국의 직업 군인이라는 점에선 분에 넘친 「정치 발언」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는 한국 정전위 「유엔」측 수석 대표라는 정치적 지위를 겸하고 있다. 그의 발언엔 「개인적 견해」라는 꼬리가 달리긴 했지만, 그의 지위로 보아 그는 다른 군인과는 달리 국무성의 직접적인 지휘 계통 아래에 있다. 다만 미국 국무성이 공식적인 「채널」을 통해 발언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럼, 미국은 왜 이런 발언을 했을까. 우선 시기가 퍽 「정치적」인 것 같다. 앞서의 완충지대 긴장 완화 제의는 지난 6월초 「미켈리스」주한 「유엔」군사령관이 미 하원에서 증언하기 위해 귀국했던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그 당시 주한미국 대사는 같은 목적으로 미국에 있었다.
이번 「한국 대표」발언도 「애그뉴」미 부통령이 내한한 그 시기와 일치한다. 하필이면 왜 이런 묘한 우연의 일치들이 일어났을까 궁금하다.
이 해답은 바로 그 「발언」의 진의를 촌도 할 수 있게 해줄 것 같다. 한가지 흥미 있는 사실은 장기 결근 (?)하던 판문점의 중공 대표가 8년만에 복귀한 것이다. 미국은 분명 그 심중에 중공을 의식하고 있는 것 같다. 엄격히 말하면 『두개의 한국론』을 암시하려는 대「중공용」발언이었을 것 같다. 우리의 감회는 오히려 착잡한 편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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