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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제자는 필자>|<제13화>방송 50년(12)|이덕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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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녹음방송 시작>
우리 나라 방송이 국제적으로 이용되기는 1937년7월 이른바 장고봉 사건 때이다.
장고봉 사건이란, 소련파 일본이 두만강근처 국경에서 1937년 7월11일 분쟁이 일어나 18일까지 1주일동안 계속되어 소련군과 일본군이 야 포까지 동원하여 치고 받은 국경분쟁인데 결국 일본의 패배로 돌아간 사건이었다.
이때 미국 CBS 극동특파원 윌스 씨가 내한, 이 진상을 취재하여 JODK의 마이크로 대미국제 방송을 한 것이 최초이다.
이보다 조금 뒤인 8월14일에도 윌스 씨가 다시 대미 방송했고 8월30일에는 JODK에서 전 일본에 이사건의 진상을 알려 라디오가 국제정세의 속보에 활용되었다.
중-일 사변이 터진 이듬해인 38년 12월부터 조선방송협회는 이른바 「궁성 요 배의 시간」을 마련하고 경성방송국은 중앙방송국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이때부터 조회 시간에 일본에 있는 저희들의 천황폐하에게 아침 절을 하도록 강요했다. 이것은 모두 조선총독부의 정보위원회에서 꾸민 것이었다. 40년에 접어들면서 방송은 소위「황국 신민의 서사」라는 것. 신사참배 그리고 영어의 배척을 벌이고 한국사람에게 창 씨 개명하라고 요구하는데 앞장을 섰다.
방송이 생긴 이래 연예 프로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아악이 줄어들고 대신 나니와 부시가 방송되었는데 이를 번역한 사람들이 청취자들로부터 욕을 듣기도 했다. 이때는 조선방송협회에서 제2기 지방 국 확장 계획에 마무리할 때로 제2차대전이 일어나는 41년 4월에 광주방송국이 생기고 청진방송국은 이중 방송시설이 되고 원산·대전·해 주에 새로 방송국 건설에 착수하고 있었다.
이 시절에 방송기술상 큰 발전이 이루어졌다. 녹음판의 사용이다.
이해에 아르마이트에 녹음하는 기술이 일본에도 도입되어 처음으로 아나운서들이 전파에 실리는 제목소리를 들어보았고 효과 있는 부분을 이리저리 뜯어 맞추어 다시 녹음하여 방송하는 일이 시작된 것이다.
이 녹음 기술의 발달로 당시의 조선총독이던「미나미·지로」가 망신을 면한 일이 있었다.
41년 12월8일, 즉 태평양전쟁이 일어나던 날 선전 포고 뉴스는 JOAK(동경)와 조선총독부에서 다루었는데 이날하오에 조선총독인「미나미」가 한국 국민에게 담화를 발표하기 위해 녹음을 하러 중앙방송국(경성방송국)에 왔었다.「미나미」는 강연도중 너무나 흥분해서 일본이 미-영에 대해선전을 포고했다는 말을 일본에 일-영에 대해서 선전했다고 큰 실수를 했다고 큰 실수를 했다.
총독이 간 뒤에 녹음만을 들려보니 큰일날 소리라 직원들이 혼비백산, 다시 녹음을 했고 이 말이 퍼지지 않도록 함구령이 내리기까지 했다. 생방송이었더라면 파면 감이 될 뻔했다.
이러한 판국에 심우섭 과장은 이미(39년)사표를 내고 나갔고 일본사람만이 있던 제2방송부장 자리에는 한국인으로 처음으로 노창성씨가 앉아 이 일들을 치렀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총독무안에 있던 정보위원회는 종전의 방송 심의 회를 총력방송심의회로 개편하여 방송 프로를 완전히 휘어잡고「내선일체」를 되 뇌이기 시작한 것이다. 뉴스는 모두가「조선총독부 제공」으로 크레디트가 붙었고 초기에만 하던 범벅방송은 도를 지나쳐 모든 뉴스와 해설에 일본말·한국말이 반반 뒤섞였다. 예를 들면『오늘「덴노헤이까」께오서는「규우죠」를 떠나「야스꾸니 진쟈」로 행차했다』고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렇게되자 42년에 한국 아나운서들이 있는 제2방송과 안에는 방송용어 및 화술 연구회라는 것이 생겼고 여기에서 이와 같은 엉터리 방송학술을 연구해냈다.
이때를 전후하여 방송 프로에서 흥겨운 민요와 어린이들의 노래시간이 조금씩 줄기 시작했고 대신「갓데구루조도 이사마시꾸」(이기고 돌아오겠다고 용감하게)하는 군가방송이 판을 쳤다.
(뒤에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되었지만 누구누구라는 명사들이 경성방송국의 마이크에서 『학도들이여 지원병으로 나가라』고 외쳐 누명을 천 추에 남기는 것도 이 무렵.)
정보위원회는 43년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서 미담 발굴이란작업을 벌여 학병으로 나가 전사한 이인석 상등병 이야기 등 일본의 군신이야기로 시간을 채워 호전성을 자랑하고 외국 단파방송 청취금지령이란 것을 만들어 귀를 가렸으나 44년에 우리 나라 방송사상 잊을 수 없는 방송국 단파사건이 기어이 터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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