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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제13화>방송 40년(7)|이덕근(제자는 필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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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라디오의 보급>
경성방송국이 27년2월 방송을 시작할 때의 출력은 말코니 송신기 1㎾였다.
실패와 희비가 엇갈리는 가운데 33년4월에 제2방송이 생길 때는 10㎾로 출력이 늘어나고 33년7월에 부산방송국이 개국하고 36년4월에 평양방송국, 37년6월에 청진방송국, 38년10월에 함흥방송국·이리방송국이 연달아 생겨 이른바 제1기 방송망계획을 이루고 있었다.
사단법인 경성방송국은 이미 32년4월7일에 조선방송협회로 개편하여 지방방송국을 통괄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초대 방송협회장은 하시·모리사다라는 일본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평안북도지사를 지내던 사람으로 일본 구주의 가고시마 태생이었는데 한국인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깊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람은 늘 자기가 한민족의 하씨 후예라고 말했으며 일본사람 직원들이 일본인우대를 해달라고 요구했을 때 이를 한마디로 거절했다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총독부의 비위에 거슬려 임기 전에 자리에서 물러났다.
조선방송협회의 2대회장은 경기도지사를 지낸 감자의방이란 사람이었다.
방송국이 개국하고 조선방송협회로 개편, 발전하는 동안 아나운서나 프로듀서 이외의 부서에서 활약한 한국인은 약15명이 있었다.
처음부터 참가했던 노창성씨는 개국할 때까지는 기수였다가 개국 후에는 기획과장으로 있었다. 일본사람만이 과장에 앉을 때에 노씨의 처우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노씨는 뒤에 방송협회가 되었을 때 사업부장이 되었다가 함흥방송국이 개국했을 때는 국장으로 나갔고 해방 뒤에는 이혜구씨에 이어 2대 KBS국장이 되었다.
노씨와 같이 송신부문의 권위이던 사람으로 한덕봉씨가 있었다. 상해에서 무선학을 공부한 분이었는데 당시로서는 무선통신사 자격증을 가진 유일한 사람이었다. 방송국을 통틀어 영어의 제1인자였다.
이밖에 고흥인씨(작고)가 있었다. 한씨와 둘이서 전파발사를 이끌어온 사람인데 한씨는 6·25때 납북되었다.
홍성찬·홍성헌의 현제(모두 작고)가 업무과에, 최병철씨(사법서 사업)가 총무과에 근무했다. 기술자로 김한룡씨(작고)가 있었고 편성 비슷한 일을 본 사람으로 방두환씨가 있었는데 그는 이사 방태영씨의 조카였다. 2대 밖에 없는 방송국자동차의 운전사로 민병선씨(작고)가 있었다.
민씨는 방송국에서 가장 많은 일화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에 방송에 출연할 연예인, 기생들을 모셔오는데는 인력거와 자동차를 사용했다. 자동차가 드문 때라서 명월관 같은 곳에 기생을 태우러 가면 칙사대접을 받아 언제나 술 한잔은 빠지지 않았다고 민씨는 기생이 명월관에서 국일관·천향원으로 옮겨도 어디 가서든지 방송 프로에 있는 기생을 시간 맞게 데려오는 재주가 있었다.
술을 많이 해서 코가 빨갛게 되어 홍코라고 불렀다. 서울의 술집은 모르는 곳이 없었고 방송국에 나오는 사람들의 단골술집, 버릇들을 모두 알아서 누구를 찾는다면 자동차로 술집으로 직행, 금방 찾아오곤 했다.
1934년에 윤백남씨의 무임으로 김정진씨(9일자에 김정섭으로 나간 것은 잘못으로 바로 잡습니다)가 취임하여 권덕규씨 강연으로 조선어강좌를 방송했을 때의 일이었다.
권씨는 방송시간을 잘 지키지 않아 담당자들을 늘 놀라게 했는데 집에 가보면 언제나 없었다고 그때마다 권 선생을 찾는 것은 민 운전사였다. 배차전표에 권덕규하고 쓰인 것을 보면 민씨는 아예 술집으로 가서 권씨를 모셔오고 했다.
술 잘 마시기로는 아나운서이던 김영팔씨도 빠지지 않았다. 방송하다가도 잠시 쉬는 시간에 야주개의 목로에 가서 50잔(물론 작은 술잔이겠지만)을 마신다는 소문이었다.
방송협회가 생기면서 본격화했지만 당시에 라디오 진료반이란 것이 있었다.
5명의 라디오 기사가 전국을 누비며 라디오를 고쳐주고 달아주고 청취료를 2원씩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판매수리를 겸한 것이다.
이때 라디오 진료반에 있던 분이 최병철씨(73)다. 최씨는 1937년에 대전주재로 되어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주재원이 되었는데 당시는 면사무스와 면 지서에 라디오를 달아주어 소리가 나오면 면장과 지서장이 술자리를 베풀어 융숭히 대접해 주는 기쁨이 있었다.
방송국이 생기기 전인 1925년에는 우리 나라에 단 5대의 라디오가 있을 뿐이었지만 방송국이 생기자 갑자기 늘어 29년까지 1만대를 돌파하여 방송국 가입과에서 기념잔치를 벌이기까지 했다.
라디오의 종류는 혼자만 들을 수 있는 광석식의 것이었다가 차차 발달했는데 29년 당시에는 8구짜리로 슈퍼헤로다인이 80원, 뉴드로다인이 60원 꼴로 꽤 비쌌다. 방송청취료는 처음 2원이었다가 나중에 1원, 75전까지 내려갔다.
우리 나라의 방송은 수신기회사가 수신기를 팔기 위해 방송국을 세우는 외국의 경우와는 달리 관의 힘으로 방송국을 세웠고, 그 다음 수신기를 제작 판매하는 길을 택해 독점사업의 길을 달린 것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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