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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제13화>방송 50년(6)이덕근(제자는 필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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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빈약한 음악 프로>
개국 초 연예 프로 중 많은 부분을 차지한 것은 음악이었다. JODK는 개국한해의 3월에 청취자들에게 왕복엽서를 이용하여 청취율을 조사해 본 일이 있었는데 42개 종목 중에서 뉴스가 4.8%, 관현악이 4.0%, 영화해설이 3.6%, 드라머가 3.2% 등으로 나타나 음악의 청취율 높은데 따라 음악 방송에 상당한 역점을 두었다.
음악은 일본음악과 우리음악으로 분류되고 다시 일본음악은 저들의 나니와부시와 가요로 구성되었고 우리 음악은 가곡·시조·속가 등으로 되어있었다. 이 밖에 양악이 있었다. 출연단체와 출연 인물, 그리고 수준은 빈약할 수밖에 없었다. 개국 당시에 음악단체로서는 경성 오키스트러와 중앙 악우회 관현악단이 있었는데 모두 15명 내로의 인원구성이 있고 악기도 색서폰의 경우 앨토 소프라노만 있고 테너는 없어서 음색을 고루게 할 수 없었다.
중앙 악우회 관현악단은 바이얼린으로 유명한 박경호, 박호영, 홍재유씨가 창설했는데 연주수준이 지금에 비하면 초보적인 것이어서 방송이 끝나면 놀림 편지가 날아들곤 했다.
1930년4월에 획기적인 기획으로 조선음악 이 동경의 JOAK에 연결되어 전 일본에 방송된 일이 있었다. 아나운서 김영팔씨의 해설로 된 이 프로는 고전·민요. 가요를 해설을 섞어 방송한 것인데 재일 교포들의 환영을 받았고 우리 나라 음악의 해외 소개로는 처음이 된 셈이었다.
당시의 관현악단의 연주곡목은 대체로 가고파 등의 가요가 많았다. 차이코프스키의 콘체르토 등 어려운 곡도 있기는 했으나 잘 이해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창이나 단가 등은 주로 명월관의 기생들을 모셔다가 불렸다. 이금옥·박산홍·윤옥향·이소향·김소희·여운선·이진봉·김옥섭 등이 나와 인기를 끌었고 명창인 이동백이 마이크를 통해 목소리를 자랑했다.
홍난파씨·전수린씨 등이 등장한 것은 1933년을 전후해서이다. 전씨는 바이얼린으로 가끔 출연하며 작곡을 했는데 한번은 제2 방송부장인 윤백남씨가 가요를 작사하여 전씨가 작곡한 일이 있었다.『님 그리워 우는 밤』이란 곡명의 이 가요는 크게 히트하여 윤백남씨의 또 다른 일면을 보였다.
가사는- 님 그리워 타는 가슴 가릴 길 바이없네. 오늘밤도 하염없이 헤매어 있네. 님이시여 오시러나. 그리운 이내마음 울지를 말자. 그 날밤이 그리워.-이었다.
대곡이 연주되기는 35년께, 계정식씨가 처음이 아닌가 한다. 계씨는 바이얼린·솔로로 청중을 매혹했었다.
제 2방송과가 생긴 1933년 5월에 처음으로 전속 음악인이 탄생했다. 바이얼린에 전수린, 클라리넷에 전수린, 피아노에 여준영씨가 전속으로 되어 가요의 반주를 맡았는데 어떤 때는 셋 가운데 한사람이 빠져 둘이서 반주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이해 가을에 이것을 모체로 JODK관현악단이 생겼고 홍난파가 지휘자로서 각광을 받은 것이다.
홍난파는 원래 컬럼비아·레코드에 있었는데 미국에 유학 다녀온 뒤 경성보육학원(교장은 얼마전 작고한 독고선씨)의 교사로 있다가 이 악단의 악장이 된 것이었다.
이 악단에 있던 분으로 전수린씨가 기억나며 난파는 얼마 안 있어 악장직을 사임해 버렸다.
지금 남산의 KBS마당에 홍난파의 흉상을 세울 때에 일부사람들이『왜 방송국 앞에 등장을 세워야 하느냐?』고 반문을 제기한 일이 있는데 이것은 홍난파가 방송국에 몸담아있던 것이 아니고 객원과 같은 위치에 있었던 까닭이었다.
35년에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아코디언이 들어왔다. 이 아코디언은 일본에 시찰 갔던 전수린씨가 동경에서 이 프랑스의 물랑루지 악단이 12개의 아코디언으로 연주하는 멋진 음악에 감탄하여 사온 것인데 방송국 측은 이 새로운 악기에 매력을 느껴 출연을 독촉했고 전씨는 산지 며칠 안돼 연습도 못해 본 악기를 들고 나와 식은땀을 흘리면서 연주한 에피소드가 있다.
이때를 전후해서 이른바 유행가수가 방송에 등장하기 시작했으나 신인의 데뷔는 참 어려웠다.
한번은 전수린씨에게 사사한 18세의 처녀가 방송국에 안내되어 가요를 부를 참이었다, 그러나 처음 마이크 앞에선 이 여인은 마이크 앞에서 자그만 목소리가 잦아들고 말았다. 간신히 노래를 불렀으나 합격이었다. 가수로 나가려다 실패한 이 여인은 다음날부터 문학수업에 전력, 지금은 여류문인의 대가로 되었다(전수린씨 요청으로 이름은 안 밝힘)는 일화도 나왔다.
관현악이라고 했지만 오보에 호른 파곳 팀파니는 없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래서 일본의 방송을 중계하는 것과 레코드를 돌리는 것이 오히려 음악으로서 좋았고 덕분에 세계의 명곡을 쉽게 들을 수 있다.
이때의 인기가수는 강석연·이애리수·전선영·김선초·전옥씨 등이었다. 눈물의 여왕으로 알려진 전옥씨는 연극으로 출발했으나 노래도 잘 불렀으며 다시 연극인이 되었다. 유행가는 버리지 마라 그리운 그 밤 등 애수에 찬 곡이었는데 출연자의 사례는 좋은 편이었다.
독창자는 보통 5원, 명창 또는 인기가수는 10원 이었다. 둘이면 깎아서 8원, 3인 합창이면 10원, 4인이면 20원, 5인 이상이면『방송국 쪽에서도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15원을 주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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