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1)정치사적 의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5·25 총선의 결과는 정치사적으로 볼 때 경제건설위주의 행정이 전환점에 이르러 정치구조의 개선이 불가피할는지 모른다는 관측을 낳게 한다.
해방 후 지금까지의 우리나라 정치사를 보통 ①민간「엘리트」에 의한 서구민주주의의 도입과 ②「톱·리더」에 의한 「카리스마」적 통치의 국민통합단계 ③60년대의 군부에 의한 경제건설단계로 보는데 이제 건설지상주의에 대한 반성기에 접어든 것이다.
한국의 집권당엔 「이피션시」(유효성)는 있었지만 「리지티머시」(정통성)는 없었다. 여당은 건설을 많이 하는 걸로 업적을 쌓아 정통성마저 부여받으려 했으며, 반면 업적이 없는 야당은 경제적 건설보다는 정치적 민주화가 더 중요하다는 명분론에 치우쳐 왔다고 볼 수 있다.
5·16이후 정부의 산업치중정책은 후진국으로서는 필연적 단계였다는 점이 야당에 의해서도 차차 인식되기 시작했으며 여당도 건설만이 전부가 아니며 정치적 민주화도 필요하다고 느껴야했다. 이러한 싯점에서 국민은 「5·25총선」을 통해 정치인을 앞질러 기왕의 정치방식에 대한 변화를 요구해온 것이다.
말하자면 유효성(산업화)에 강하고 정당성(민주화)에 약했던 공화당과 정당성에 강하고 유효성에 약했던 야당이 모두 경종을 받은 것이다.
선거결과는 여당에 대해 경제건설을 하면 국민의 지지를 얻는다는 또는 얻을 수 있다는 평면적 평가는 버려야한다는 교훈을 주었다. 서울·부산 등 지역적으로 가장 개발된 곳일수록 표의 향방은 집권당이 자기방식대로 정치하기 어려움을 나타내 주었기 때문이다. 경제건설은 불가피하게 농촌의 도시화를 촉진하고, 또 도시와 농촌의 격차가 줄고 근대화를 통해 도시인구가 늘면 늘수록 집권당의 「컨트롤」권 외에 도는 유권자의 수는 증가하는 셈이다.
흔히 말하는 「여촌야도」현상이 일반적인 추세라고 한다면 산업화가 되면 될수록 여당의 지지기반은 줄어드는 것이기 때문에 건설위주정책을 재고하든지, 이를 예정대로 추진키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정치적 민주화 문제에 대해서도 심심한 고려를 해야한다는 과제를 이번 선거는 여당에 제시해준 것이다.
복수정당제도와 공명선거는 민주주의의 핵심이며 본질부분이다.
민주주의란 한마디로 말해 정부가 국민에 대해 책임을 지는 정치. 국민은 정부를 자유롭게 선택할 권리를 갖고 정부의 권력행사를 「컨트롤」 할 수 있는 권리를 유보하고 있어야 되는데 불행히도 우리의 현실은 그렇게 되지를 못했었다.
본질부분인 공명선거가 보장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입헌정치·권력분립 등도 제도대로 완벽하게 시행되어 왔다고 할 수 없었던 현실이었다.
5·25 선거는 정부가 국민의 「컨트롤」권 외에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지금까지의 정치방식에서 탈피하여 방향전환을 하도록 희망하고 경종을 울린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5·25」는 국민이 선거를 통해 권력을 「컨트롤」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인 것이기 때문에 정치사적 전환점이 될 수 있으며 「조용한 개혁」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번 선거가 집권당에 대해 5·16후의 통치방식에 변화를 요구하는 여망의 표시였다면, 야당에 대해서도 유권자들이 새로운 「이미지」를 요구한 결과였다고 말할 수 있다.
4·27선거에서 김대중후보가 5백40만표를 얻은 것이나 5·25 선거에서 무명의 신인들이 대거 진출할 수 있던 것은 국민들이 젊은 사람, 「새얼굴」을 원한 반증인 것이다.
정치차원의 엄청난 불균형에다가 진산 파동의 상처를 안고 싸운 신민당이 89석의 원내의석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40대인 김대중씨의 후보지명에서 비롯된 「변화」를 국민들이 일찌기 바라고 있었음을 입증한 것으로 파악해야한다.
이와 같은 국민적 기대를 밑바탕으로 하여 신민당은 예상 이상의 선전으로 정권교체의 가능성을 어느 때보다도 높여놓았다. 선거 때마다 논란의 초점이 되는 정치차원의 여당에 의한 통제나 독점문제도 상황이 이쯤되면 차차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된다.
후진국의 기업인일수록 정치에 민감하게 마련이므로 정치와 기업의 관계도 변모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선거를 통한 또 하나의 교훈은 행정의 영향력이 한계점에 왔다는 점이다.
개발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언론「컨트롤」 같은 것은 때로 필요하다고 보는 견해도 없지는 않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도리어 역기능으로 정부에 불리해질 수도 있다.
사발통문이 나돌아 시골 구석구석까지 「루머」가 번져 여론조성에서 신문 이상의 위력을 발휘했다면 투표행위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한국의 정치를 권력을 집중시키려고 하는 여당과 권력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권력분산 요구의 대립으로 이어져왔다고 한다면 「5·25」는 권력집중이 전환점에 다다라 권력분산에의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집권당의 뜻에 의해서가 아니라 현실의 여건이 어쩔 수 없이 그러한 방향으로 간 것이라 볼 수 있다.
지금까지의 정치과정을 살펴보면 집권당은 그것을 의식했건 의식치 못했건 간에 문제에 부닥쳐 처리를 해 나가다 보니까 지금 이 시점에까지 이르른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정치인들을 앞지른 국민의 높은 정치의식이었다. 5·25이후의 정치전개는 이와 같은 국민의 높은 정치수준을 정치인들이 의식하는 가운데 이루어 질 것이며 이루어져야한다. <정리=이억순 정치부차장>
대담 차기벽(성균관대 교수) 우병규(경희대 교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