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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제12화 조선은행(3)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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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일합방이후 대정말기인 1926년까지는 말하자면 일본 상업자본의 대한진출이 본격화하였고 이들에 의한 금융자본화 경향이 두드러졌다. 이에 맞서 토착민족자본도 금융기관의 형태로 집결되어 가위 금융전국시대를 이룬 감이 없지 않았다.
더우기 한국의 금리가 일본금리보다 고율이어서 금리 차를 노려 시체말로 「호트·머니」가 대량 일본에서 유입되었다. 이를 막기 위해 나온 것이 조선이식제한령(191l년)이었으나 일본자본의 유입을 효과적으로 막지는 못했던 것 같다. 이식제한령에도 불구하고 일본자본의 진출이 늘어남에 따라 새로운 은행령(1912년)이 공포되었다. 이는 한일양국인의 공동경영에 의한 은행설립 준칙을 규정한 것이다.
이른바 요즘의 합작투자를 규제한 셈인데 이는 일제침략의 본격화에 따라 양국인간의 경제관계도 점차 형태를 바꾸게 되었고 상호제휴, 또는 일본인이 한국인을 앞장세우는 형태로까지 발전하게 된 때문이었다.
작금의 한일경제협력 관계가 당시의 이같은 정세와는 꼭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 은행령에 따라 한일 합작투자로 발족한 것이 1912년 말의 대구 선남상업은행(뒤에 선남은행으로 개칭) 구포의 구포은행(뒤에 경남은행으로 개칭) 등이었고 1913년에는 부산상업은행 및 대구은행이 각각 설립되었다.
이렇게 늘어난 은행 수는 14년 말 현재 본점 11개소, 지점 출장소 28개소, 불입자본금 3백31만원이었는데 6년후인 20년 말에는 본점만 해도 23개소에 불입자본은 7천9백95만원으로 크게 늘어났다.
이 많은 은행들은 영세성을 탈피하지 못했으며 협소한 영업소에 대출업무도 주로 어음할인·상품담보대출 등 소규모의 상업금융에 국한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제의 정책적, 지원을 받고있던 몇몇 일계 은행을 제외하면 거의 모두가 자금난·경영난 등으로 부심이 심했다. 이 무렵에 조선은행의 주요과제는 엽전과 제일은행권을 회수하고 새로 발행된 조선은행권의 유통을 늘리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각 지방에 설립되어 있던 농공은행(1906년에 설립된 정책금융기관으로 각도에 1개씩 있었음)과 지방금융조합을 발판으로 무이자대부 국고금조변·조선사업공채인수 등을 통해 조선은행권을 뿌렸다.
1909년11월 조선은행설립 당시 제일은행에서 인계받은 화폐발행고는 1천1백80만원이었는데 동년 연말엔 1천3백43만원으로 한달동안에 14%인 1백63만원이 늘어났다.
그후 발행고는 계속 격증, 3·1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 말에는 무려 1억6천3백60여만원에 달했다.
이같은 조선은행권의 급격한 팽창은 주로 일본의 만주침략의 본격화에 따른 자금뒷받침 때문이었다. 1913년부터 만주 각 지역에 지점·출장소 등을 설치한 조선은행은 이곳에 화폐발행고의 50% 가까운 은행권을 유통시킨 적도 있었다. 더우기 일제가 대연·여순 등 관동주와 만철 부속지 일대에 조선은행권을 강제유통(1917년)시킨 뒤 화폐발행액은 더욱 늘어났다.
조선은행의 만주진출은 그때까지 만주에서 일본국고업무를 맡고 있던 횡빈정금은행으로부터 이 업무를 인수받게 되었고 그때까지의 중국화폐제도인 은건제를 폐지, 대신 금본위제로 바꾸었다. 국내여신도 당초의 13개 점포에서 식민지 무역체제에 알맞게 개항장을 중심으로 지점이 확장되었으며 대한수출입의 본거인 대판과 동경에도 지점이 생겼다. 만주 각지에의 진출 이외에도 조선은행은 「하르빈」 「블라디보스토크」 등 「시베리아」에 손을 뻗쳤으나 「러시아」가 「블라디보스토크」지점설치를 인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곳에 있던 일계 송전은행을 자회사로 이용하는 편법을 썼다. 18년에는 상해·「런던」, 19년에는 「뉴요크」에도 사무소를 열어 외환거래가 매우 활발해졌다.
이 무렵 나는 2년동안 일하던 계산계에서 조사실로 옮겼다(1919년). 지금의 한은 조사부는 중앙은행의 가장 핵심부서가 되어 직원수도 제일 많지만, 당시의 조사실은 직원도 10여명 정도로 빈약했다. 그러나 물가조사나 전통있는 조사월보는 그때에도 고심해서 만들었다. 통계자료를 받으러 매일같이 총독부청사가 있던 왜성대(지금 KBS자리)로 올라 다니면 녹음이 우거진 주위경치가 참 좋았었다.
조사실 2년 근무를 마치고 다시 계산계로 옮긴 이태후쯤 부산상업을 만학으로 졸업한 권영중씨(한은대구지점장·흥업은행 상무역임)가 입행했고, 그 이태 후에는 동경상대를 졸업한 구용서씨(전 한은총재)와 선린상을 졸업한 박승준씨(한은 감독부장·증권거래소 이사장 역임) 등이 입행(1924년)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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