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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시가전(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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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9월27일 하오까지 국군과 미군은 서울시를 거의 탈환했다.
동북교외에서는 아직 산발적인 소탕전이 계속됐지만 서울시에서의 적의 조직적인 저항은 27일 하오를 기해 끝났다. 불타지 않은 큰 건물에는 한미국기가 휘날리고 집집마다 태극기가 꽂혔다. 이제 시내에 숨은 적 낙오병만 색출해 내면 수도는 완전히 수복되는 것이다.
서울시가전의 「하일라이트」는 아무래도 수도의 상징인 중앙청의 탈환과 여기에 태극기를 꽂는 일.
이 영광과 「드릴」에 찬 중앙청의 태극기 게양은 한국해병대 제2대대 제6중대 1소대원들이 수행했다.

<측면공격으로 시청탈환>
박정모씨(당시 해병 제2대대 6중대 1소대장=소위·예비역해병대령·현 우석대학교 학생지도연구소근무·46) 『26일 하오3시에 우리소대는 덕수궁과 반도「호텔」쪽으로 돌아서 측면공격을 가해 시청을 탈환했습니다. 처음에는 태평로 편에서 정면공격을 시도했으나 적의 저항이 심해 측면으로 돈 거지요. 시청에 태극기를 꽂고 나와 정문 위에 걸려있는 「스탈린」과 김일성의 대형 초상화를 떼다 불살랐어요. 이때 종군기자로 서울에 들어 온 박성환씨(고인)가 달려와서 「인터뷰」를 청하면서 미 해병 제5연대가 지금 중앙청을 공격중인데 이왕이면 우리해병대가 탈환해 보라고 권해요. 이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소원이며 현상금까지 걸었다는 거예요. 박기자의 말을 들으니 동감입디다. 나는 중앙청에도 내 손으로 태극기를 꼭 꽂겠다고 결심했어요.
통신병에게 대대본부 호출에도 일체 응답치 말라고 지시해놓고 내 소대병력을 정돈했어요. 나는 작명도 없이 곧장 광화문을 향해 진격했읍니다. 중앙청을 바라보니 화염에 싸여 빨간 불덩어리예요. 미군기들이 「네이팜」탄으로 때리고 포탄이 막 날아갑디다. 세종로에서는 적들이 「바리게이드」를 쳐놓고 맹렬히 저항해요. 뚫고 나가려다가 도저히 안돼서 저녁 7시에 조선「호텔」의 대대본부로 돌아왔어요. 와보니 내 소대가 4시간이나 연락이 끊겼다고 야단들이예요. 김성은 참모장은 처벌하라고까지 했다는 거예요.

<허리띠 매어 타고 옥상으로>
김종기 대대장에게 전후사정을 보고하니까 수궁합디다. 대대장이 신현준 해병사령관과 김성은 해병사참모장에게 졸라서 중앙청공격의 허락을 얻었어요. 밤새 중앙청에 걸 태극기를 구했는데, 사병 한명이 용케도 대형국기를 구해왔어요. 이래가지고 27일 새벽 3시부터 우리 소대는 중앙청을 향해 진격을 개시했습니다. 세종로 일대에는 적들이 20m간격으로 방공호를 파놓고 한 호속에 2명씩 들어박혀 기관총과 박격포를 쏘며 발악을 합디다. 어떤 호속에는 허기진 적병이 비틀거리는가 하면 총을 쥔 채 꾸벅꾸벅 조는 자도 있어요. 세종로의 적 호 진지를 돌파하고 중앙청에 다다르니까 건물은 연기에 싸여 숨이 콱콱 막혀 질식할 것 같습디다. 앞을 분간할 수 없어 무조건 수류탄을 던지며 들어갔어요.,
중앙청 안에서 버티던 적들도 질식할 것 같으니까 그냥 도망쳐 버렸어요. 옥상으로 올라가는데 화기 때문에 구역질이 나요. 중앙「돔」에 올라가자면 철재로 된 사다리를 밟아야 하는데 포격으로 끊겨 우리는 「와이어·로프」를 타고 올라가려고 했읍니다. 나는 태극기를 몸에 감고 최국방 수병과 함께 「로프」를 타고 올라가다가 「로프」가 끊어져 떨어졌어요. 다시 대원들의 혁대를 모두 풀어 모아 줄을 만들고 이것을 타고 옥상에 올라가니까, 구멍이 작아서 밖으로 나갈 수가 없어요. 작대기를 올리게 해서 거기다 태극기를 동여매 가지고 옥상밖에 내 걸었습니다. 이때가 27일 아침 6시쯤이었어요. 나는 이 전공으로 금성을지훈장을 받았읍니다.』
한편 괴뢰군은 서울방어전을 어떻게 전개했는가를 여러 자료와 증인의 입을 통해 간추려 보겠다.
북괴는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자 서울을 고수함으로써 한미군의 남하와 동진을 견제할 계획이었으나 군이나 당 행정요원들이 모두 전멸할 때까지 사수할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들은 21일이나 22일쯤에 영등포와 「서부방벽」에서 격전이 시작될 무렵에 서울에 와 있던 정치·경제·군사의 기관요원을 철수시킬 준비를 하고, 서부방벽이 무너진 24일 밤에는 영등포에서 패퇴해 들어온 제18사단의 5천 병력을 의정부 방면으로 빼내려고 했다.
즉 북괴는 24일 저녁에 서울방어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25일부터 본격적으로 철수에 착수하려고 했다. 그런데 25일 아침에 미7사단의 32연대와 한국군 17연대가 서빙고를 기습, 도하하여 남산을 점령하는 동시 동남쪽으로 진출했다.

<적, 주력철수 위해 반격작전>
이 서빙고도하는 적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지형이 험한데다가 넓은 한강을 불과 몇 시간의 준비로 2개 연대의 병력이 단숨에 건널 줄은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북괴군은 서울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고 판단, 25일 밤에 각 기관의 철수를 서두르면서 전선을 시내동북부로 축소시켰다.
그러나 미군의 포·폭격으로 퇴로가 차단되어 주력부대의 야간이탈이 예정보다 지연된데다가 미군이 단숨에 시내로 돌입할 기세이어서 북괴군은 25일과 26일 밤에 주력철수를 엄호하기 위해 최후의 역습을 감행했다.
남산일원에 대해서는 1개 대대로, 그리고 서대문지구에 대해서는 1개 중대의 병력으로 각각 10여대의 「탱크」를 앞세워 자살적인 야습을 가해왔다. 대부분이 남한출신 의용군으로 된 이 반격부대는 독전대의 감시하에 돌격해 오다가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 앞에 궤멸됐다.
이들의 희생으로 북괴군의 주력과 기관요원들은 북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적의 서울 방어전 막바지에 가서는 그들 군대보다도 시당부에서 끝까지 사수하려고 했다는 사실이 한 증인의 증언으로 밝혀지고 있다. 이점은 북괴의 6·25전사인 소위 『조선인민의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사』에도 『인천·서울 방어부대는 신병과 훈련 불충분한 장병으로 된 신편성의 부대였지만 인천·서울방어전에서 「당원」들의 중추적 선구자적 역할에 의하여 영웅적 투쟁을 전개하여 여러 빛나는 위훈을 세웠다』고 기록돼있다.

<서울시 당서 철수명령>
이병칠씨(당시 조선노동당 서울성북구소속 서울상대세포책·62년 남파귀순·현 ○○연구소연구관·47) 『인천이 떨어지고 「유엔」군이 서울로 진격해오자, 괴뢰들은 낙담과 혼란에 빠졌어요. 괴뢰군 패잔병들은 전의를 잃고 몇명씩 떼를 지어 서울을 통과 북상하고요. 그러나 조선노동당 서울시 각 구역 당에서는 서울을 우리 힘으로 지킨다면서 핏발을 세웠어요. 요소 요소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전투준비를 했는데 나는 성북구 역당원이어서 삼선교에 방어진지를 구축했어요. 무기라고는 휘발유병과 창·몽등이 정도지요. 시당부에서는 무기는 어떻게 수단껏 마련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북상 도주하는 괴뢰군 패잔병한테서 무기를 빼앗았지요.
몇자루의 장총과 개인화기·수류탄 등을 마련하고 50여명의 당원이 「미군놈들 오기만 해봐라」라면서 기염을 토했어요.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격으로 전투경험도 없는 적은 인원들이 사기만은 높았어요. 그러다가 포탄 한발이 삼선교 근처에 떨어지면서 집 한 채가 폭삭 내려앉으니까 좀 겁이 납디다. 「유엔」군이 남산과 시내를 점령하자 우리 성북구당원들은 일전을 단단히 각오하고 있었어요. 어차피 「유엔」군이 이 길목으로 반드시 쳐들어 올테니까요. 그런데 이때 갑자기 의정부로 미리 후퇴했던 서울시당부에서 그곳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이 왔어요.
모두들 「룩색」을 짊어지고 후퇴준비를 하는데 이때부터는 갑자기 겁이 나면서 두 다리가 와들와들 떨립디다. 참 사람의 심리란 묘한 거예요. 막상 후퇴 길에 오르니까 아까까지의 사기는 온데 간데 없고 서로 앞장을 서려고 해요. 이때부터 산을 타고 북상하는데 「유엔」군이 앞질러 진격하는 바람에 「게릴라」가 됐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선이 다시 남하했을 때 표면에 나왔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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