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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현장 취재…70만 교포 성공과 실패의 자취|제3국의 비자를 기다리는 유랑 이민들|붸노스아이레스 (아르헨티나) 김석성 순회 특파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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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미주>(12)
「붸노스아이레스」의 도심지에서 서남쪽으로까지는 109번선 시내「버스」를 타고 가면 종점 지대에 지저분히 널려 있는 연립 주택가가 있다. 서울과 굳이 비교한다면 용산구 서부이촌동 쯤 위치하는 곳이라 할까. 109번의 「버스」가 다닌다 해서 한국 이민들은 통칭 이곳을 『109번 촌』이라 부른다. 행정 구역상 이름은 「코보이구라파리케」. 이른바 「아르헨티나」의 한국인 촌이다.
원래 이곳은 「아르헨티나」의 「페론」정부가 노동자의 주택난을 해결한다고 날림 벽돌집 1천2백여 동을 지어놓았던 빈민 주택가인데 그 한 모퉁이에 한국 이민들이 집단으로 모여 살고 있는 것이다. 현재 이곳에 살고 있는 한국 이민 수는 약 1백20가구. 「아르헨티나」 한국 대사관이 비공식으로 밝힌 한국 이민 수가 1천5백여명이라니 3분의1 이상이 「109번 촌」에 모여 살고 있는 셈이다. 그밖에 빈민촌에 살고 있는 이민은 150번 시내 「버스」종점인 「소르다이」근처에 6가구, 역시 126번 「버스」종점인 「레티로」에 4가구가 판잣집 같은 곳에 살고 있다. 이곳에 사는 한국 이민들은 대부분 「파라과이」에서 이탈, 「아르헨티나」로 입국한 사람들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68년이래 한국에서 곧장 들어온 초청 이민들.
109번 촌의 어귀에 들어서면 웃통을 훌렁 벗은 채 길가의 「아카시아」 나무 그늘에 앉아 바람을 쐬고 있는 원주민의 모습도 보여 흡사 한국의 어느 시골 마을을 찾은 듯한 인상이었다. 바로 이웃한 판자촌에는 작년에 대거 밀입국한 「볼리비아」인들이 날품팔이를 하면서 어수선한 분위기 가운데 살고 있다.
지난 2월엔 식품 가게에 2인조 강도가 들어 「아르헨티나」주민을 쏴 죽이고 돈을 빼앗아 달아난 사건이 일어났는가 하면 3월에는 목재상이 또 총 맞아 죽었다. 이 주변이야말로 「붸노스아이레스」시 경찰 당국이 가장 두통거리로 여기는 우범 지대. 경찰 당국은 이곳의 파출소를 경찰서로 승격시켜 놓고 관내에 3개의 파출소를 증설할 만큼 범죄 예방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런 생활 환경 속에 휩싸여 있기 때문에 우리 이민들의 집들도 차분할 리 없었다. 연립주택의 크기는 9∼12평 정도. 「시멘트」바닥의 5, 6평 남짓한 거실에는 편물기의 틀이 놓이고 그 앞에서 주부들이 열심히 「스웨터」를 짜고 있었다. 대낮에도 형광등을 켜놓은 집안에는 습기마저 축축이 젖어 있었다.
109번 촌에 사는 한국 이민들의 생업은 7할이 편물 짜기. 나머지가 행상과 이 나라 사람들이「알마센」이라고 부르는 식료품 가게를 차리고 있으나 「아르헨티나」에서 한국인을 대변하는 생업은 편물 짜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편물업에 종사하는 이민이 대부분이다. 그밖에는 달리 기술도 없고 자본도 없기 때문에 가내 수공업의 규모를 벗어나지 못하는 편물에 생계를 의지할 따름이었다. 이들 이민들 가운데는 영관급 장교 출신이 10여명, 대학교 전임 강사급 출신이 2, 3명 있었으나 대부분 한국에서 상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본국에서 가져온 돈을 털어 집집마다 편물기 (일어로 「요꼬」라고 부르는) 1대 마다 28만 「페소」∼30만 「페소」(「페소」는 원의 가치와 거의 똑같음)를 들여 사놓고 주로 유대인으로 구성된 중간 상인들이 갖다 주는 실로 「스웨터」를 짠다. 「스웨터」는 무늬 없는 경우 한장 짜는데 4백「페소」, 무늬 있는 것은 종류에 따라 5백「페소」∼1천「페소」씩의 수공료를 받는다. 숙련공은 하루에 무늬 없는 「스웨터」는 l5장, 무늬 있는 것은 7장∼12장까지 짠다.
그러나 「스웨터」 한 장마다 봉조값을 60「페소」∼1백「페소」씩 떼고, 또 처음 일하게 되는 사람은 중간 알선 업자에게 한장에 50「페소」씩 주고 일감을 얻기도 한다. 새 이주자를 상대로 일거리를 맡아주는 한국인 알선 업자도 4, 5명이 생겨나, 돈벌이의 경쟁은 먼 이국에 나가 있는 동포 사이에서도 에누리가 없다는 것을 드러내기도 했다.
작업 시간은 집집마다 다르지만 평균 12시간씩 일하는 집들이 대부분. 어느 집은 8시부터 시작해서 자정이 넘도록 일하는 집들도 있다. 이들의 평균 수입은 1인당 월10만「페소」가량. 가족이 많으면 많을수록 총수입은 늘어나기 때문에 수입상으로는 대가족 이민이 유리하다. 그 때문에 어린이들까지 하학 후 편물을 짜는 집들도 있으며 매일 상오 2시까지 일하다 안면 방해를 한다는 이유로 이웃 원주민들로부터 들창에 돌 세례를 받은 일도 있다.
이 같은 노력의 댓가로 이민들의 실수입이 본국에 있을 때보다 훨씬 향상되고 있음은 분명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들의 어느 누구도 편물을 생업으로 삼으면서 「아르헨티나」에 정착하려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 편물 작업은 다만 눈앞의 생계를 위해 계속할 따름이지, 생업으로 발전시키려는 사람도 없으며, 더구나 이들의 생업을 육성하는 당국의 대책 같은 것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고 「아르헨티나」의 이민들은 마치 후조의 서식처처럼 109번 촌에서 언어나 지리를 익히며 편물을 짜다가 적당히 돈이 생기면 생활 조건이 더 나은 제3국으로 이주해 버리는 경향이 많았다.
「파라과이」농업 이민으로 갔다가 이곳에 왔다는 김광철씨 (42) 에 따르면 65년 말에서 69년 사이 90가구가 109번 촌에 입주했으나 지금까지도 계속 편물을 짜고 있는 사람은 20가구뿐, 나머지 가구는 미국 「캐나다」 「브라질」등지로 이주해 버렸다는 것. 그리고 지금 있는 이민은 그 뒤 새로이 한국에서 들어온 초청 이민이라고 했다.
한편으로는 떠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들어오는 유랑적 이민의 생태는 109번 촌 이민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명색 이민으로 와서 남의 나라 빈민촌에 모여 산다는 것이 떳떳치 못한 줄은 알지만 돈을 벌 때 까지는 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느냐』고 조명구씨 (53) 는 말했다.
그는 농업 이민으로 왔다가 실패 끝에 이탈한 사람. 좀 여유가 생기면 다른 곳으로 떠나겠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66년에는 권리금 30만「페소」만 내면 연립 가옥 (12평 정도)을 살 수 있었던 것이 그나마 지금은 또 만「페소」에서 1백만 「페소」까지 거래되고 있다. 제3국으로 떠나는 사람이 많은 만큼 다시 초청 이민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늘기 때문이다. 최근 「아르헨티나」이민들 사이에는 『당신은 t짜리냐, 20g 짜리냐』고 묻는 말이 유행이다.
이민선을 타고 왔느냐, 그렇지 않으면 비행기를 타고 고급 이민으로 왔느냐고 묻는데서 나온 말. 초청 이민 가운데는 아무런 연구자 조차 없이 초청장을 가짜로 얻어 입국한 예가 「아르헨티나」이민청에 의해 적발되어 말썽마저 일으키고 있다.
무리한 이민 생활을 통해 빚어지는 출입국 관리법이나 이민법 위반 사건은 남미 각국의 한국 이민 사회에 큰 문제로 등장되고 있다. 이민들이 제3국을 찾아 불법 이주하는 예는 거의 지능적이다. 남미 각국의 어수룩한 곳에 있는 미국 공관에 찾아가 관광「비자」를 얻고는 그대로 가족과 함께 철새처럼 날아가는 것이다. 한 이민이 「콜롬비아」에서 미국 입국 「비자」를 얻었다고 소문나면 그쪽으로 몰리고, 「에콰도르」에서 얻었다면 또 그 나라의 주재 공관에 쫓아간다.
심지어 「가이아나」의 「조지타운」에 있는 조그만 미국 영사관을 물색한 한 이민이 「비자」를 얻는데 성공했다고 알려지자 10여명의 한국 이민의 가구주가 줄달아 「비자」를 신청하는 통에 그곳에서 모처럼 신망을 얻고 일하는 한국인 의사가 울상을 지었다는 것이다.
「아르헨티나」에서 미국에 이주한 K목사의 경우 『미국 각주에 있는 한국인 교회에서 순화 예배를 하기 위해 미국에 가겠다』고 점잖게 입국 「비자」를 얻어 미국에 가버린 뒤로는 종내 무소식, 관계자들을 당황케 했다는 뒷 얘기도 있다. 미국뿐만 아니라 「브라질」 「멕시코」 「캐나다」등도 한사코 「비자」를 내주는데 인색하다. 「브라질」이 입국「비자」를 얻지 못하는 일부 「아르헨티나」이민들은 임기응변 책으로 국경 지대의 관광지로 유명한 「이구아스」폭포에 관광을 가는 것처럼 「버스」를 타고 가 그 곳에서 교묘히 「상우파울루」로 들어가는 모험을 예사로 하고 있다고 「아르헨티나」에서 18기를 가르치고 있는 유수남씨 (31)는 『무턱대고 내보내 놓고 보살피지 않는 이민 정책은 지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대로 놓아둬도 잘 살아간다』는 방식의 이민 정책 때문에 무수한 불법 사태가 뒤따른다는 것이다.
유씨는 정부가 이민에 대해 「생업의 집단화 지원」을 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아르헨티나」에서 이민으로 성공한 일본인의 경우 꽃재배, 세탁업을 주요한 생업으로 삼아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며 유대인은 금융·직조·보물상, 「스페인」이민은 식당 및 식품업의 「이탈리아」이민은 기계 공업·면직업을 주산업으로 이루고 있다.
한국도 어떤 특정 산업을 골라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이민 정책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칠레」에 꽃 재배 이민으로 갔다가 이곳에 온 김영식씨 (52) 는 『정부 보증으로 「아르헨티나」 정부에서 주택 자금을 융자받아 한국인 촌을 건설토록 하면 지금처럼 이민들이 유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생활 안정의 바탕이 앞서야 정착이 이뤄진다는 것. 그렇지 않고서는 「아르헨티나」에 온 한국 이민은 「109번 촌」의 생태처럼 짧은 기간에 밤낮없이 일하다가 웬만큼 손에 돈이 잡히면 다시 어디론가 훌쩍 떠나 버리는 일을 언제까지나 되풀이 할 것이다. 이민은 철새가 아니기 때문에 무엇보다 정착할 수 있는 정책이 아쉽다는 것이다.
「요꼬」라고 부르는 편물 기서 앞에 놓고 밤낮 없이 편물을 짜는 「109번 촌」의 한국인들 『돈 벌면 잘 살아 볼 테니까 아직 이 모양은 한국에 알리지 말아 달라』고 어느 젊은 부부는「카메라」를 외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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