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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자가 본 길전 서한|당시의 문안 작성자 배택 의원 회견 <동경=조동오 특파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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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일본의 대 중공 접근 움직임과 관련하여 최근 대두된 세칭 길전 서간의 처리 여부는 앞으로 일본의 대 중공 정책 방향을 가름하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되고 있다.
지난 11일 궁택통산상의 『길전 서간은 이미 실효 되고 있다』는 발언으로 촉발된 「길전 서간 논쟁」은 밖으로 자유중국 정부를 자극했고, 안으로는 중공의 「길전 서간 폐기 요구」에 일본 정부가 굴복하는 징조를 보였다는 점에서 문제가 되고 있다.
길전 서간이란 작고한 길전무전 수상이 『대중공연불 수출에서는 수출입 은행 자금을 사용시키지 않겠다』고 자유중국 장개석 총통에게 약속한 서간. 당시 길전씨는 이미 수상직에서 물러나 정계 원로의 자리에 있었고 이 서간이 사한에 불과하지만 당시의 지전내각의 주요 각료가 사전에 이 서간을 승인했기 때문에 이것은 협정에 준하는 「문서」로 양국간의 대 중공 무역의 규범과 같이 취급되어 왔다.
길전 전수상의 측근이자 비서관으로서 길전 서간의 문안을 작성했고 일본과 자유중국간의 절충에 직접 참여한 현 자민당 외교부회장 배택직길 (70) 중의원은 기자와 만나 길전 서간 작성의 이면과 앞으로의 전망을 자세히 밝혔다. 동경 영전정 제1의원 회관 607호실에서 만난 배택 의원은 『한일 국교 정상화를 촉진하라는 고「케네디」대통령의 의사를 내가 당시의 타전 수상에게 전달, 이것을 계기로 현재의 한일 친선 관계가 수립됐다』고 「친한」의 뜻을 먼저 표명한 다음 『길전 서간의 시종을 알고 있고 현재도 일본 자민당 외교의 주류에 꺼어 있는 나로서는 이 서한은 영구히 유효한 것이며 일본이 자유중국과의 친선 관계를 단념하지 않는 이상은 협정과 같이 준수해 나가야 할 것이다』라고 자신의 해석을 말했다.
-길전 서간이 작성되게 된 동기는?
-63년 가을께였다. 일본과 자유중국 관계는 최악의 사태에 빠졌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제1은 당시 지전내각이 창부「레이온」회사의 「비닐론·플랜트」를 수출입 은행 자금에 의한 연불 방식으로 중공에 수출할 것을 허가한 사건이다.
이 조치는 결과적으로 『일본 정부가 중공을 재정 지원하게 된다』는 관점에서 자유중국으로부터 강력한 항의를 받았다.
제2는 당시 중공의 섬유 기술자인 주홍경의 망명 요청을 일본 정부가 주의 중공 송환으로 처리해 버린 사건이다. 제3은 당시 지전 수상의 대북 방문 예정을 출발 직전에 취소한 일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 때문에 자유중국 정부는 주 일본 자유중국 대사인 장미생씨 이하 전 대사관원이 63년 말까지 철수해 버렸으며 양국간의 무역도 중단되는 위급한 사태에 빠졌다.
-그때 길전씨는 어떻게 조정 역할을 했는가?
-당시 장 총통이 길전 전수상의 중재를 바랐고 국내에서도 길전 전수상의 자유중국 방문조정을 바라는 소리가 높아 길전 전수상이 3일간 대북을 방문, 장-길전 회담이 열렸다.
이때 장 총통은 자유중국과 중공이 교전 상태에 있는 시점 아래서 연불 수출은 일본 정부 자금으로 중공의 경제력과 전쟁력에 「플러스」를 가져오는 것이라는 점을 들어 일본 정부 처사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길전 전수상도 이의가 있을 수 없었다, 때문에 양자 의견의 일치를 보고 귀국했다. 그런데 귀국 직후 당시의 복전일 통산상이 대 일본 통적의 「비닐론·플랜트」의 수출입 은행 자금에 의한 연불 수출을 허가하겠다고 기자 회견에서 밝혀 자유중국은 장-길전 회담의 합의에 대한 배신을 분격, 양국 관계는 다시 암초에 부딪친 것이다.
-길전 서간의 형식은?
-이런 환경 속에서 길전 전 총리와 나, 그리고 대북의 목촌 대사가 상담, 자유중국 정부가 길전씨에게 보낸 서간의 답장 형식으로 양국간에 각서 같은 것을 내기로 합의했다. 문안은 지전 총리와 목촌 대사와 내가 만들었다.
길전 전 총리도 문안을 살펴본 후 지전 총리의 승인을 얻으라는 지시가 있었기 때문에 내가 원내 총리 대신실에서 지전 총리를 만나 대평외상·전중장상·궁택경기원장관·복전통산상이 합석, 문안을 검토한 후 내각의 승인을 얻어 「길전」의 이름으로 자유중국 정부에 제출한 것이 역사적인 길전 서간이다. 그 내용은 ①중공에 대한 「플랜트」수출의 금융을 순수한 민간 「베이스」로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자유중국의 희망에 따르도록 한다. ②적어도 64년 중에는 대 일본 방적의 「비닐론·플랜트」를 수은의 자금을 사용, 중공에 연불 수출하는 것은 허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길전 서간으로 타협이 성립되어 위도명 (전 외교부장) 씨가 새 주일 대사로 부임했고 대평 외상의 대북 방문, 장군 비서장의 일본 방문 등으로 해빙의 길이 틔어 친선 우호에서 경제 제휴의 유대를 강화하기에 이른 것이다.
-일본 여당 및 정부간에서 길전 서간의 폐기 또는 실효 등의 움직임이 있는데?
-지금까지의 경위 설명에서 명백해진대로 길전 서간은 준 협정과 같은 구속력을 갖는 양국의 외교 문서다. 장 총통의 말대로 『이것은 사한이 아니라 파일 평화 조약을 보충한 것으로서 이것을 파기하는 것은 파일 조약을 파기하는 것이다.』
-궁택통산상의 국회 발언 등 세계의 대 중공 접근 「무드」에 영합하려는 움직임을 어떻게 보는가?
-궁택통산상은 당시 경제기획청 장관으로 길전 서간을 승인한 장본인이다. 그도 잘 알고 있을테지만 국제 신의를 중히 여기는 좌등 수상이 있는 한 「케이스·바이·케이스」로 일본 정부가 검토한다지만 지금까지와 같이 「노·케이스」로 끝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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