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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우근 칼럼

말, 인격, 국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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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대표

“한글의 우수성을 널리 알려야 할 것 같습니다.” 한글날 무렵에 흔히 듣는 말이다. 한글의 우수성은 널리 알리는 것이 마땅한 일이지 ‘알려야 할 것 같은’ 일이 아니다. “일본 같은 경우는 독도가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하지만 역사적 근거가 없는 억지 주장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텔레비전 뉴스 진행자의 발언이다. 한·일 관계에서 ‘일본 같은 경우’는 없다. 한국의 경우, 일본의 경우가 있을 뿐이다. 억지 주장이 분명하다면 ‘…같습니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억지 주장입니다’로 끊어야 옳은 표현이다.

 좋은 것 같아요(좋아요), 맛있는 것 같아요(맛있어요)…. ‘같다’라는 말이 걷잡을 수 없이 넘쳐나는 반면에 그 상대어인 ‘다르다’는 정작 써야 할 때도 제대로 쓰이지 않는다. “사람은 모두 틀려.” 그야말로 틀린 말이다. “사람은 모두 달라”라고 해야 한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같다·다르다’는 인식의 기본 범주의 하나인 동일성의 판단에 쓰는 용어다. 이것이 잘못되면 인식체계에 혼란이 올 수 있다.

 높임말·낮춤말도 뒤죽박죽이다. 방송에 나와 ‘저희 나라’(우리나라), ‘제 부인’(제 아내) 운운하는 지식인이 적지 않다. 대통령을 ‘당신’이라고 부른 정치인은 그것이 존칭이라고 우겼다. 당신은 3인칭일 때는 높임말이지만 2인칭일 때는 예사말이다. 부부나 동료 사이에서 스스럼없이 쓸 수 있는 호칭이다. 면전에 없더라도 청자(聽者)인 2인칭으로 쓰면 존칭이 아니다. 우긴다고 어법(語法)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믿음을 품고 당신을 2인칭 높임말로 쓰는 경우도 있다. 하나님을 당신이라 부르며 기도하는 기독교 신자들이다. 기도의 대상은 2인칭이다. 아버지·어머니를 당신이라는 2인칭으로 부르지 못하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워낙 인자하셔서 그런지 예사로이 당신이라 부른다. 신앙이 어법마저 바꿀 수 있는지는 몰라도 교회에 다니는 아이들이 당신을 2인칭 높임말로 잘못 배우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여전히 남는다.

 존칭보조어간도 엉뚱한 데 붙기 일쑤다. 선생님이 빨리 오시래, 시간이 계시면, 옷이 예쁘시네요, 값은 2만원이세요…. 옷과 돈이 존칭으로 불리다니, 물질만능 풍조 탓인가. 아무에게나 쓰는 피붙이 호칭도 유별나다. 남편은 오빠, 처음 보는 손님도 아버님·어머님이다. 어르신은 모두 할아버지·할머니, 중년이면 죄다 아저씨·아주머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3촌 이내 핏줄인 친족 사회가 어찌 이리도 삭막한가.

 되게 아름다워, 되게 부드러워, 되게 훌륭해…. 젊은이들이 즐겨 쓰는 ‘되게’라는 말은 ‘아주·몹시’라는 뜻의 부사인데, 원래는 어떤 일이 힘에 벅차거나 반죽에 물기가 적어 뻑뻑하다는 뜻이다. 어감(語感)이 그리 밝지 않다. 아름답다·부드럽다·훌륭하다는 말에 어울리는 수식어는 아니다. ‘우연찮게’는 보통 ‘뜻하지 않게’라는 의미로 통하는데, 그 반대말인 ‘우연하게’도 ‘뜻하지 않게’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니 적잖이 당혹스럽다.

 쎄게(세게)·따른(다른)·이상하케(이상하게)·쏘주(소주)·교꽈서(교과서), 쬐끔(조금)…, 경음(硬音)이 범람하고 있다. 된소리, 거친 발음을 낸다고 말뜻이 더 강조되는 것은 아니다. 말이 거칠면 정서도 삭막해진다. 입시전쟁·세금폭탄·선거전·표심공략·결사항쟁…, 온 나라가 싸움판이다. 심지어 생일 축하 모임에서도 주먹 불끈 쥐고 ‘파이팅’을 외친다. 무슨 싸움을 하려는 것일까.

 인터넷에서 오가는 막말은 우려의 수준을 크게 넘어섰다. 그래도 정치권에서 쏟아내는 폭언과 비속어, 홍어X·귀태·대마왕 따위의 기상천외한 요설(饒舌)보다는 그나마 나을지 모른다. 헌법의 면책특권은 욕설·비방·거짓말의 불법 면허처럼 누추해졌다. 점잖다던 판사들도 막말 행진에 몸을 실었다. 공개 법정에서 연로한 피해자에게 ‘늙으면 죽어야지’라고 내뱉은 재판장, 대통령을 ‘가카새끼 짬뽕’으로 비아냥거린 부장판사도 있다.

 ‘대恨민국’ ‘가화만사性’ ‘死법부’처럼 뜻을 비틀어 쓴 시사만평도 배우며 자라나는 세대에게 그릇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 청소년의 언어 습관은 나라의 미래와 직결된다. 말이 바르지 못하고 거칠다는 것은 언어공동체의 품격과 정서가 그렇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는 세계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정의했다. 언어의 혼란은 정신세계의 파탄을 의미한다. 말은 곧 인격이요, 국격(國格)이다. 10월은 한글날이 있는 달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우리글을 못된 말, 사나운 말, 바르지 못한 말을 기록하는 데 쓸 수는 없다. 우리 말글에는 우리의 얼이 담겨 있지 않은가.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