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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워라, 바삭한 튀김과 핑크빛 로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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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5호 23면

매년 와이너리 투어를 마치고 하루 정도 파리에 머물 때면 한 끼 정도는 꼭 중국 식당에서 해결한다. 프랑스 식으로 현지화된 음식을 저렴한 가격으로 쉽고 빠르게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와인도 샴페인부터 레드 와인까지 사이즈별로 있으며 중국 맥주도 리스트에 빠지지 않는다.

김혁의 와인야담 <2> 파리의 중국 식당과 로제 와인

한 번은 노트르담 근처에 있는 중국 식당에 혼자 간 적이 있다. 음식을 주문하고 로제 와인도 한 병 가져다 달라고 했다. 하지만 직원이 와인을 오픈하면서 보여준 코르크는 이미 한 번 딴 것을 다시 막아둔 것이었다(필자 앞에서 병 입구의 알루미늄을 제거하지 않았고 코르크가 이미 조금 올라와 있었다). 와인을 따는(척하는) 직원의 표정이 아주 불편해 보였는데 아마 여러 사람이 남긴 것을 한 병으로 만든 것 같았다. 잘 모를 것이라 생각되는 혼자 온 동양인에게 덤터기를 씌우려는 수작(?)임에 분명했다.

시음하라고 따라준 와인을 조금 맛본 필자는 초조해 하는 직원에게 “지금 오픈 한 것이 맞느냐”고 물었다. 직원은 몹시 당황한 표정으로 바로 바꾸어 주겠단다. 다른 와인을 가지러 간 직원이 홀에서 마주친 주인에게 “거 봐요, 통하지 않을 거라 했잖아요”라며 신경질을 내는 소리가 나지막이 들렸다.

그러나 내게 웃음을 준 것은 그 다음 취한 직원의 행동과 표정이었다. 이번에는 아주 당당하게 병을 내보이며 코르크를 감싸고 있는 부분을 직접 벗겨 보였다. 그리고 자신 있게 시음을 권했다. 그의 표정에서는 “넌 도저히 거절할 수 없을 거야”라는 도도함이 느껴졌다. 조금 전 저지른 무뢰한 행동은 모두 잊었다는 듯. 한 모금 마신 잔을 급하게 채우려는 직원에게 말했다. “온도가 좀 높네요. 아이스 통에 넣어 주세요.” 당당했던 직원은 아무 말 없이 통을 가져다 와인을 담가 주었다.

사실 필자가 파리에서 가장 즐겨 찾는 중국 식당은 리옹 역 아래 있는 곳이다. 우연히 발견해 15년 정도 이용해 왔다. 처음 이곳 문을 열었을 때 냄새가 달랐던 기억이 난다. 주인 여자는 성격이 호탕했고 종업원들도 손발이 척척 맞았다. 특히 혼자 오는 나이 많은 단골 손님이 많았다.

이곳에서 우선 간장으로 맛을 낸 매콤한 수프로 속을 푼다. 이어 네 조각 나오는 넴과 야채를 먹고, 주 요리로 오리 고기 아니면 작은 냄비에 닭고기와 각종 야채를 넣어 조리한 요리를 흰밥이나 볶음밥과 함께 먹는다. 혼자 먹기에 좀 많은 양이지만 2주 정도 여행 후 이곳에서 먹는 중국 음식은 정말 식욕을 돋운다.

여기에 시원한 로제는 환상의 궁합이다. 요리마다 와인을 맞추려면 최소 두 종류는 마셔야 되지만 적당하게 차가운 로제는 화이트와 레드의 맛을 조금씩 나누어 갖고 있어 다양한 중국 음식에 두루 잘 어울린다. 특히 연분홍색을 띈 프로방스 로제는 직접 포도를 압착해 얻어낸 색을 얻든가 아니면 적당히 껍질에서 색을 우려낸 타닌이 가볍게 느껴져 기분 좋은 질감을 더한다. 무엇보다 기름에 튀긴 바삭한 램과의 조화는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돌게 한다.

지난해 기쁜 마음으로 그곳을 찾았는데, 들어설 때 이미 냄새부터 달랐다. 아니나 다를까, 주인이 바뀌었고 맛도 달라졌다. 사실 파리는 세월이 지나 찾아와도 옛 식당과 카페와 공원을 볼 수 있어 추억을 되찾을 수 있는 곳이었는데 지금은 파리도 조금씩 변해가고 있고 더불어 추억도 밀려나는 느낌이다. 아! 이제 어디서 파삭한 램과 분홍빛 시원한 로제를 즐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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