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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창의 정신과 개인주의 정립한 에세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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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5호 28면

에머슨의 식각판화(engraving·1878년).

벤저민 애너스터스라는 작가는 뉴욕타임스(NYT)에 실은 칼럼(2011년 12월 4일)에서 지나친 개인주의가 미국 정치의 품격을 떨어뜨리고 있다며 그 뿌리는 랠프 월도 에머슨(1803~1882)의 『자기신뢰론(Self-reliance·1841)』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의 셧다운, 국가부도 위기의 배경에도 공동체의 이익을 무력화시키는 개인주의가 도사리고 있는지 모른다.

힐링 시대 마음의 고전 <18> 랠프 월도 에머슨의 『자기신뢰론』

에머슨이라는 인물, 『자기신뢰론』이라는 책이 무엇이기에 오늘날의 미국 정치 상황에 일정한 책임이 있는 것일까. 에머슨은 1837년 하버드대에서 행한 연설 ‘미국의 학자(The American Scholar)’에서 유럽에 대한 미국의 사상적 독립을 선언했다. 『자기신뢰론』은 미국의 개인주의를 정립한 책이다. 에머슨은 유럽의 지성들과 ‘맞짱 뜰 수 있는’ 19세기 미국 최초의 철학자, 공공지식인(public intellectual)이었다는 얘기다. 여기에 딴말하는 사람은 없다.

“네 자신을 믿으라”
개인주의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에토스(ethos·氣風)에 각인됐다. 에머슨의 개인주의는 초강대국 미국의 건설에 기여한 정신적 원천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모든 공(功)에는 과(過)가 따라붙는다. 학자들은 미국식 개인주의에서 발견되는 독선·공격성·자기도취, 지나친 낙관 성향의 뿌리 또한 『자기신뢰론』의 과(過)라고 지적한다.

『자기신뢰론』의 한글판(왼쪽)과 영문판 표지.

우리 국어사전에도 나오는 미국 작가 올리버 웬델 홈스(1809~1894)가 ‘미국 헌법의 비공식 부속 문서’라고 일컬은 『자기신뢰론』은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소크라테스가 “네 자신을 알라”라고 했다면, 에머슨은 “네 자신을 믿으라(Trust thyself)”라고 역설했다. 무슨 근거에서 나 자신을 믿은 것일까. 플라톤, 페르시아의 시인들, 동양 종교와 철학의 영향을 받은 에머슨은, 인간 내부에 신성(神性)이 있다고 봤다. 에머슨의 자기신뢰는 그리스도교의 신(神)이 아니라 우리 인간 내부에 있는 신을 인지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에머슨은 1829~1832년 유니테리언주의(Unitarianism)를 표방하는 교회의 목사였다. 삼위일체 신앙에 대해 회의적인 교파였다. 예수가 훌륭한 사람이며 ‘하나님의 아들’일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아니라고 믿는 교단이었다. (※이처럼 우리의 ‘선입견’과는 달리 미국 개인주의의 종교문화적 원천에는 정통파 삼위일체 기독교(Orthodox Trinitarian Christianity), 청교도주의뿐만 아니라 유니테리언주의라는 ‘이단적’ 교의가 포함된다.)

첫 번째 아내 앨런이 폐결핵으로 사망한 충격의 여파로 신앙적 회의가 가속화돼 1832년 목사직을 그만둔 에머슨은 더욱 래디컬(radical)하게 됐다. ‘신(神)은 있어도 사후세계란 없다’며 오직 이 순간 지금 이곳밖에 없다고 믿게 됐다. 『자기신뢰론』은 기독교·성경·예수가 특별할 게 없다고 주장한다. 궁극적인 진리를 추구해 온 거대한 인류의 여정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그리스·이집트의 종교와 마찬가지로 기독교는 한 지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측면에서 보면 에머슨은 특정 문화의 우월성을 부인하는 문화적 상대주의, 문화적 다원주의의 원조 중 한 명이다.

『자기신뢰론』은 또 이렇게 설파한다. 말 바꾸기, 생각 바꾸기는 정상적인 것이다. 사회의 압력 때문에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은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다.

『자기신뢰론』은 미국 창의 정신의 기초 문헌이기도 하다. 에머슨은 ‘앵무새’를 혐오했다. 대부분의 사람이 사물과 사건을 자기 자신의 고유한 이해가 아니라 사회의 기존 지식에 대한 기억으로 논한다는 말이다. 『자기신뢰론』에 따르면 내 머릿속을 떠도는 생각에 천재성창의성이 있다. 내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이 보편적이다. 그 아이디어를 구현해야 한다. 그 작업을 내가 하지 않으면 누군가 다른 사람이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다른 사람은 천재라는 칭송을 받을 것이다. 그러니 망설이지 말고 내 생각을 말로 뱉어내고 글로 쓰고, 특허를 내어 저작권을 주장하라는 말이다.

니체가 읽으며 ‘차라투스트라’ 구상
에머슨은 동정심이나 자선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에머슨은 동정심의 이면에 사실은 이기주의가 도사리고 있으며, 동정심은 그 대상을 연약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고통을 증대시킬 뿐이라고 생각했다.

중국인의 과장이 심하다고 하지만 영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영어 속담에 “한계가 되는 것은 하늘밖에 없다(The sky is the limit)”라고 했다. 하늘에는 테두리가 없으니 애초에 한계라는 것은 없다. 『자기신뢰론』에서 에머슨은 같은 생각을 이렇게 표현했다. “마차를 매달 때에는 별을 말뚝으로 삼는 게 딱이다(Hitch your wagon to a star).” ‘우주(宇宙)가 네 집이요, 지구 전체가 네 주차장이다’라는 식의 인식이다. 에머슨은 ‘허풍쟁이’였던 것이다. 에머슨은 또 이렇게 말했다. “우주의 풍성함은 곧 나를 위한 것이다(The wealth of the universe is for me).”

에머슨 팬클럽 회원에는 마하트마 간디, 마이클 잭슨, 버락 오바마가 포함된다. 잭슨은 노랫말로 에머슨 사상을 구현했다. 에머슨은 특히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여행 다닐 때마다 에머슨의 저작물을 지참한 니체는 일기와 서신에서 에머슨을 찬양했다. 그는 1881년 여름 『자기신뢰론』을 읽으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85)를 구상했다. 니체가 말하는 초인(超人·bermensch)의 뿌리는 『자기신뢰론』이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다.

에머슨은 전형적인 대기만성형 인간이었다. 하버드대를 다닐 때에는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형제 넷이 모두 하버드를 다녔는데 그중에서 공부를 제일 못했다. 수월(秀越)보다는 평범에 가까웠다. 에머슨은 1838년 하버드대 신학대 연설에서 과격한 주장을 펼쳐 한동안 ‘기피 동문’이 됐다.

세월은 계속 흘렀다. 에머슨은 40여 년간 1500회 이상의 강연으로 미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남녀평등과 노예제 폐지를 주창했다. 이윽고 에머슨은 하버드대에서 복권됐다. 가장 자랑스러운 동문 중 한 명이 됐다. 하버드대 철학과는 그의 이름을 딴 에머슨 홀(1900년 건립)에 자리 잡고 있다. 에머슨 홀 현관에 새겨진 문구는 다음과 같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님은 사람을 이토록 생각해 주십니까(What is man that thou art mindful of him)?”(시편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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