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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의 반란 … NC 다이노스 탈꼴찌 비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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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과거 롯데의 제2연고지였던 마산구장은 열광적인 응원 때문에 ‘야구의 성지’로 불렸다. 마산 팬들은 연고지에 생긴 신생 구단 NC 다이노스의 서포터로 변신했다. 마산 팬들이 지난 4월 2일 롯데와의 개막전에서 환호하고 있다. [창원=이호형 기자]

지난 4월 프로야구 9개 구단 대표이사들이 모인 한국프로야구위원회(KBO) 이사회에서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NC 다이노스 말입니다. 저래서 되겠어요? 괜히 신생 구단이 들어와 프로야구의 질만 떨어뜨리는 것 아닌가 모르겠어요.”

 이태일(48) NC 대표가 자리에 없을 때 몇몇 구단 대표들이 사담으로 나눈 말이었다. 지난해 퓨처스(2군)리그를 거쳐 올해 프로야구 1군에 합류한 신생구단 NC는 기존 구단들의 걱정 또는 조롱을 들어야 했다.

 열정으로 무장한 막내들의 봄은 춥고 가혹했다. 개막 후 7연패. 한 번도 이기지 못한 게 문제가 아니라 영원히 이기지 못할 것 같았다. 선수들은 어이없는 실수를 연발했고, 긴장감 탓에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NC의 위기는 곧 프로야구의 위기였다. 2012년 700만 관중을 돌파하며 호황을 누린 프로야구는 올해 류현진(26·LA 다저스)의 미국 진출, 박찬호(40)의 은퇴 등 악재를 만났다. 게다가 뿌리가 약한 신생팀 NC가 자리를 잡지 못하면 프로야구 전체의 경기력과 흥행 모두 심각한 타격을 받을 건 자명했다.

소주 반입 금지 … 요즘은 치킨·맥주 즐겨

김경문 감독(왼쪽)이 이끈 NC는 개막 후 7연패에 빠지며 혹독한 성장통을 겪었다. 그러나 5월부터 상승세를 타며 1군 진입 첫해 4할 승률을 달성해 당당히 7위에 올랐다. 김 감독과 NC는 이제 창단 첫 가을야구를 꿈꾼다. NC 선수단이 지난 8월 SK전(가운데)과 6월 LG전을 치르는 모습. [중앙포토]

 “4월? 어휴, 그땐 생각하기도 싫어.”

 김경문(55) NC 감독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고는 잠시 멋쩍은 미소를 비쳤다. 시즌을 마무리할 때면 어떤 감독도 “시간이 참 빨리 갔다”고 말한다. 그러나 김 감독에게 지난 6개월은 길고 힘들었다. 그는 “4월엔 정말 말도 안 되는 실책을 저질렀다. 한 경기 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잠도 제대로 못 잤다”고 떠올렸다.

 NC는 지난 5일 창원 마산구장에서 열린 SK와의 최종전을 끝으로 2013년 정규시즌을 마무리했다. 삼성·LG·넥센·두산은 뜨거운 포스트시즌을 치르고 있다. 그러나 NC는 4강 진출팀 못지않은 성과를 냈다. 52승4무72패, 승률 0.419를 기록한 NC는 정규시즌 7위를 차지했다. 시즌 전 우승후보로 꼽혔던 KIA(0.408)를 8위, ‘우승 청부사’ 김응용(72) 감독이 지휘하는 한화(0.331)를 9위로 밀어냈다. 4월의 성장통을 잘 견뎌낸 NC는 사춘기 소년처럼 쑥쑥 자랐다.

 김경문 감독은 “우리에게 4월이 참 잔인했다. 그런데 오히려 그게 우리를 도왔다. 너무 못했으니까, 너무 힘들었으니까 우리의 부족함을 냉정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며 “덕분에 더 공부하고 노력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시련의 끝에 예쁜 꽃이 피었다.

 NC가 창단되기 전까지 마산구장은 롯데의 제2구장이었다. 마산 아재(아저씨의 방언)들은 롯데가 일 년에 서너 번 경기를 치르러 오면 신이 나서 야구장으로 모였다. 소주 한 병, 라면 한 사발을 끼고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 마산 아재들은 롯데에 가장 열정적인 팬이었고, 다른 팀에는 가장 극성스러운 안티팬이었다.

 NC 팬이 된 신승만(37)씨는 초등학교에 다니던 1980년대 중반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하루는 어떤 아저씨가 팬티만 달랑 입고 마산구장 외야석으로 뛰어갔다. 색깔이 누런 팬티 속에 입고 있던 상의를 다 구겨 넣어서 기저귀처럼 두툼한 팬티를 만들었다. 그러더니 미끄러운 파울폴을 잡고 착착착 기어 올라갔다. 술 한잔 하셨는지 스파이더맨보다 더 민첩했다. 마산 아재들은 일단 소주 한 병을 마신 뒤 야구를 보고 응원을 했다.”

 롯데가 지는 날에는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화가 난 아재들은 두 패로 나뉘었다. 한 패는 구단 버스를 향해 돌을 던졌고, 또 다른 한 패는 버스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땅바닥에 드러누웠다. 선동열(50) KIA 감독은 “예전 마산 아재들은 악명이 높았다. 해태가 이긴 날엔 마산 팬들이 몰려들어 구단 버스를 흔들었다”고 회상했다. 김경문 감독도 선수 시절 마산 팬들을 겪어봤다. ‘말 하나, 행동 하나도 조심해야겠다’며 잔뜩 움츠렸던 김 감독은 지난해 2군 경기를 치르며 마산 아재들을 겪었다. 2군 경기였기 때문인지 거친 팬들이 별로 없었다. 1군에 올라와 치른 올 시즌 홈 개막전에서 NC는 ‘경남 라이벌’ 롯데에 3연패를 당했다. 두산 감독으로 승승장구했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을 이끈 김 감독에겐 뼛속까지 시렸던 사흘이었다.

 “마산 아재들이 열심히 응원해 줬는데 개막 3연패를 당했다. 얼마 전까지 롯데를 응원하신 팬들에게 아주 큰 실망을 안겨드린 것이다. 고향에 새로운 팀이 생겨서 롯데에서 NC로 바꾸신 분들 아닌가. 그분들 속이 얼마나 탔겠는가.”

 롯데전 연패로 풀이 죽어 있던 김경문 감독은 쓸쓸하게 마산구장을 나서려 했다. 문밖에는 마산 아재 수백 명이 모여 있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김 감독은 ‘이거 큰일났구나. 별수 있나. 야단치시면 맞아야지’라고 생각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데 한 팬이 소리쳤다. “감독님. 고생하셨습니다. 서울 경기에서는 꼭 이기고 돌아오이소.” 같이 있던 마산 아재들이 다 함께 손뼉을 쳤다. 마산 아재들은 김경문 감독에게, NC 선수들에게 큰 용기를 줬다.

올 시즌 평균 관중 8261명 전체 5위

 올 시즌 마산구장에는 평균 8261명이 입장했다. 9개 구단 중 5위에 해당하는 관중 동원력이다. 흥행 기반이 약한 NC가 프로야구 흥행에 찬물을 끼얹을 거라는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요즘 마산 야구팬들은 가족과 함께 야구장을 찾는다. 어린이 보호를 위해 NC 구단은 소주 반입을 금지하고 있다. 마산 아재들은 소주와 라면 대신 치킨과 맥주를 즐긴다.

 NC는 4월 한 달 동안 4승17패를 기록했다. 수비 실책은 9개 구단 중 단연 많은 27개나 됐다. 사회인 야구에서나 볼 수 있는 ‘진기명기’ 같은 장면들이 쏟아졌다. “NC가 프로야구의 품질을 떨어뜨린다”는 목소리는 이때부터 나왔다. NC가 개막 7연패를 기록했던 4월 11일 이태일 사장과 배석현 단장은 도저히 사무실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다른 팀 2군 구장을 뒤져서라도 내야수비를 보강할 선수를 찾아야 했다. 배석현 단장은 “팀이 무너지는 걸 보기 너무 괴로웠다”고 말했다.

 각자 발품을 팔았던 이태일 사장과 배석현 단장은 잠실 근처의 ‘문 카페’에서 만났다. 김경문 감독의 이름을 딴 커피숍이다. 두 사람 사이엔 긴 침묵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건 이태일 사장이었다.

 “지금 우리는 너무 조바심을 내고 있다. 이제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들에게 달리기를 요구하는 것 같다. 혼자 기어 다니다가 일어서 걷고, 때가 되면 마침내 달리는 거다. 우리부터 이렇게 우왕좌왕하면 안 된다.”

 이 사장과 배 단장은 딱딱하게 굳었던 얼굴을 풀었다. 그러고는 나란히 앉아 환하게 웃는 사진을 찍어 김 감독 휴대전화로 전송했다. ‘감독님, 웃으세요. 우리에게는 절망이 아닌 희망이 있습니다’라는 메시지도 덧붙였다. 이날 NC는 신인 이재학의 호투에 힘입어 LG를 4-1로 이겼다. 굳이 다른 팀에서 선수를 더 데려오지 않아도 NC엔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었던 것이다. NC 창단 후 첫 승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NC는 5월 들어 전혀 다른 팀이 됐다. “태어나서 잠실구장을 처음 밟아본다”던 어린 선수들의 표정엔 조금씩 자신감이 엿보였다. 알을 깨고 나온 아기공룡처럼 그들은 무섭게 성장했다. 5월 승률은 무려 0.545(12승10패1무)에 이르렀고, 한화를 꼴찌로 밀어냈다.

 프로야구 1군에 진입하자마자 승률 4할을 넘긴 팀은 NC와 1991년 쌍방울(52승3무71패·0.425)뿐이다. 1986년 탄생한 빙그레(현 한화)는 31승1무76패, 승률 0.290으로 최하위였다. 2000년 SK도 44승3무86패, 승률 0.338, 2008년 히어로즈(현 넥센)가 50승76패, 승률 0.397에 머물렀다. 출범 32년째를 맞은 프로야구는 상당한 전력 안정화를 이뤘다. 신생 구단엔 꽤 단단한 진입장벽이지만 2013년 NC는 반란을 일으켰다.

 한 시즌 만에 스타들도 꽤 나왔다. NC의 외국인 투수 찰리 쉬렉은 평균자책점 1위(2.48, 11승7패)에 올랐고, 신인왕 유력 후보 이재학(2.88, 10승5패)은 2위를 기록했다. 김종호는 도루왕(50개)을 차지했고, 권희동은 올 시즌 신인 가운데 가장 많은 15홈런을 터뜨렸다. 어리고 서툰 만큼 성장 속도가 무서울 정도로 빨랐다.

 김경문 감독은 “이제 한 시즌을 치렀을 뿐이다. 우리 선수들이 많이 배우고 느꼈다. 막내 선수들이 경험을 쌓은 게 큰 소득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NC의 내년 목표는 4강 진입이다. 신참 티를 벗고 형님들과 똑같은 목표를 내걸고 달리겠다는 의미다. 김 감독은 말을 이었다.

 “이제 우리도 가을야구를 목표로 할 것이다. 야구 오래했다고, 경험이 많다고 4강에 가는 건 아니다. 막내 딱지를 떼었으니 형님들과 제대로 승부하겠다.”

글=서지영 기자
사진=이호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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