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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고정애의 시시각각

싫은 사람과도 대화해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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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고정애
정치국제부문 차장

당연한 주장을 하려 한다. 한·일 간에 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뻔하다고? 맞다. 기자로선 금기다. 하지만 그런 비판에도 써야 한다는, 아니 쓸 수밖에 없다고 절감케 하는 현실을 더 의식한다.

 일왕 아키히토(明仁)의 말이다. “나 자신과 관련해 간무(桓武)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후손이라고 『속(續)일본기』에 적혀 있어 한국과의 연(緣)을 느낀다.” 12년 전 기자회견에서의 발언이다. 실제론 그보다 3년 전인 1998년에도 말했었다. 일본을 방문한 DJ(김대중 대통령)에게였다. 일왕은 만찬에서 “한때 우리나라가 한반도의 여러분께 크나큰 고통을 안겨준 시대가 있었다”고 한데 이어 환담에서 “교토에 도읍한 간무 천황의 생모가 백제에서 온 귀화인”이라고 말했다.

 그 다음 날엔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총리가 공동선언에서 “일본이 과거 한때 식민지 지배로 인해 한국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이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과를 하였다”고 말했다.

 그런 날이 있었나 싶을 게다. 실로 그런 시절이 있었다. 한·일 관계 전문가들이 수시로 곱씹으면서 되돌아갔으면 하고 바라는 시기다. 좋았던 시절, 말 그대로 ‘벨 에포크’였다.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때 일본의 무서움을 맛보았던 게 관계 개선 요인 중 하나일 터이다. 하지만 “1500년 교류사에서 (한·일) 사이가 나빴던 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때 7년, 메이지(明治) 유신 후 40년 등 50년 정도다. 이 기간 때문에 1500년의 좋은 관계가 손상되는 건 부끄러운 일”이란 DJ의 언급에서 드러나듯, 외교적 노력 또한 무시하기 어렵다.

 500년 전 한 현인은 “우방이 아닌 군주는 당신이 항상 중립으로 남아 있기를 원하는 반면 우방인 군주는 항상 무기를 들고 지원하길 원한다”고 말했다. 500년 전에만 그랬겠는가. 오늘의 딜레마이고 미래에도 딜레마일 것이다. 가운데 낀 우리는 가장 해악(害惡)이 적은 대안을 고를 수밖에 없고 말이다. 어제의 대안이 오늘의 대안이란 보장이 없으니 탐색하고 또 탐색해야 할 터다. 이 과정에서 “서로의 차이를 표명했고 서로에게 귀를 기울였지만 차이를 극복하기에는 아직 부족함을 알게 되었다”(브렌트 스코크로프트 전 백악관 안보보좌관)는 단계는 필수불가결하다.

 지난해 이명박 전 대통령이 군 위안부 문제로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전 총리와 낯을 붉히고, 독도 방문으로 일본을 뒤집어 놓았을 때를 떠올려봐도 알 수 있다. 그런 ‘냉랭한’ 시기에도 이동관 전 청와대 홍보수석은 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 측 인사들과 물밑접촉을 했다. 이 전 수석은 “왜 쓸데없이 여기 가서 이 말을 하고 저기 가서 저 말을 하냐고 욕을 먹었다. 그래도 노력하는 게 외교”라고 말했다.

 지금 한·일 정상은 데면데면하고 실무자들은 만나길 꺼린다. 동북아평화협력을 한다는데 정작 그중 한 나라인 일본과는 평화로 나아가긴커녕 말조차 섞지 않는 듯하다. 마치 국회 특히 야당 대하듯, 북한 대하듯 한다.

 일본에 근원적 책임이 있긴 하다. 과거사·우경화·재무장 등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그러나 ‘이웃’이란, 외교적 상대란 본질이 달라지진 않는다.

 다시 DJ의 얘기다. 2001년 그와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과의 만남은 ‘재앙’이었다. 부시가 DJ를 “이 사람(this man)”이라고 한 회담 말이다. DJ는 “나에게 무례했고 결국 우리 국민을 무시했다”고 분노했다. 그러나 1년 뒤 만남에선 부시가 북·미 대화 가능성을 시사하며 “레이건 전 대통령이 ‘악의 제국’(소련)과도 대화했다”고 말했다. DJ 자신의 말을 그대로 한 거였다. DJ는 당시 이렇게 설득했다고 한다. “친구와의 대화는 쉽고 싫은 사람과의 대화는 어렵지만 국가를 위해, 필요에 의해 대화할 때는 해야 한다.” 지금 그러고 있는가.

고정애 정치국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