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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제10화>양식 복장(1)이승만<제자는 필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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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외국인의 내한
서양화가 이승만씨는 오히려 삽화가로 더 알려진 노 화백이다. 1903년 서울 통인 동의 일찍 개화한 가정에서 태어나 교동 소학교·휘문 중학을 거쳐 일본의 천단화 학교에서 미술을 수학했다. 한때 「토요회」에도 관계했고 「매일신보」에 근무하며 삽화를 시작했다. <편집자 주>
서양 복장이 언제부터 우리 나라에 들어왔는지 나는 증언할만한 자료를 갖고 있지 못하다. 처음으로 양식 복장을 본 기억은 내 나이 여섯 살 나던 해인가 싶은데, 금년 69세이니까 한일합방 3∼4년 전에 해당한다.
그 이전에도 한국에는 미·영·독·불·노 등 서양 사람들이 꽤 드나들었고 일본의 양복장이가 또 적잖이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개화의 역사가 비로소 열리는 시기였으므로 장안을 누비고 다니던 개구쟁이들에게도 냉큼 눈에 띌 만큼 많지는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아주 어릴 때 귀에 익히 들은 서양인의 얘기는「색시부인」이란 여성이다. 전에 궁궐에 와있던 여성이므로 한번도 보았을 리 만무하지만 집안 어른들 사이에 오가는 말을 하도 많이 들어서 직접 본 듯이 착각되기도 하는 그런 모습이다. 영국 여성인 그는 궁내에서 외교관 초대연회 때 서양 음식을 만드는「쿡」으로 채용돼 있었다. 그에게 「색시부인」이란 어중띤 이름을 붙인 것은 나이가 많음에도 미혼인 까닭에 처녀이지만 부인에 속한다는 의미로 그렇게 불렀던 것 같다. 시쳇말로는「올드·미스」이다. 일개 내인의 지위에 불과한데도 그의 뚱뚱보 몸집이며 궁궐을 드나들 때의 옷차림과 심지어 음식 맛에 이르기까지 이러쿵저러쿵 소문이 많았다.
여성은 문밖 출입을 해서 안 되는 시절이다. 그런데 이「색시부인」은 멀리 한국에까지 와서 아 적으로 궁중에 출근을 하니 구실에 오를밖에 없다.
같은 무렵인 1893년께 우리 나라에 와서 궁중을 출입했던 영국 왕실 지리학협회 회원인 「이사벨라·버드·비쇼프」 여사가 「색시부인」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모르지만 그가 쓴 『미지의 나라 「코리아」』라는 여행기에는 시골 여인숙에서 겪은 체험담을 통하여 당시의 사회상을 생생하게 그려 놓았다. 「비쇼프」 여사는 그 즈음 우리 나라에 와있던 극소수 서양 여성의 한 사람일 것인데 우리 나라 농촌을 단신모험으로 두루 순회하였다는 점에서 유일한 외국 여성일 것이다. 『이 여행 중에서 나는 거의「코리아」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본래「코리아」사람들은 수 백년 간 외국 사람들을 보지 못하였다. 더구나 서양 여자라고 하면 시골뜨기의 눈에 역사상 처음 구경하는 까닭에 서로 다투어 몰려들었다. 내가 처음으로 여관에 들렸을 때의 일이다. 여관에는 삽시간에 구경꾼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내가 들은 방의 창문은 순식간에 수십 개의 구멍이 뚫려 몽고계 인종 특유의 눈동자가 그 구멍에서 별처럼 반짝이었다. 나는 하는 수없이 준비해 온 「커튼」을 쳤으나 어디서 금새 가지고 왔는지 장대로 「커튼」도 걷어치우고 말았다.
나중에는 밖에서 들여다보는 정도로 만족이 안되었던지 내방은 삽시간에 그들에게 점령되고 말았다. 어떤 자는 내가 펴놓은 침대 위에 조심조심 드러누워 보기도 하고, 이웃 방에 쌓아놓은 짐을 어루만져 보기도 하였다. 여인네들이나 애들은 내 옷을 잡아당기며 보기도 하고 「핀」을 빼거나 머리털을 비교해 보며 혹은 신을 매만지고 자기 팔을 걷어올려 내 팔에 대어보기도 하였다.
모자를 써 보는가 하면 그 넓적한 손바닥을 내 좁은 장갑 속에 끼어 넣는 등 실로 귀찮아 견딜 수가 없었다. 세 번이나 그들을 몰아냈지만 그들은 달아 났다가도 이내 파리 떼처럼 모여들었다….』
채 1백년도 못되는 불과 80년 전 이야기다. 남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원산에 이르기까지 말을 타고 혹은 보행으로 다닌 그녀의 여행기에는 또 이런 대목이 있다.
『「코리아」사람들은 모두 친절하고 적의를 가지는 사람들이란 없었다. 다만 서양인을 처음 대하는지라 매우 신기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호기심이란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다. 그들은 나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으나 내가 움칫하면 이내 개미떼처럼 도망해 버려 앞에 나와서 말을 하려 하지 앓았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엽전을 흔들어 보이는 법을 배웠다.…』
외국인들의 인상에 『참으로 구경 좋아하는 민족』이란 말을 들을만하다. 워낙 오랫동안 구경거리에 굶주려 온 터이라 양식이라든가 신식이라면 곧 희한하고 신기한 구경거리요 하는 짓마다 이상하고 놀라는 것뿐이었다. 기껏 해서 남도의 광대나 사당패가 오면 그것이 최고의 구경거리요, 간혹 임금이 무슨 일로 궁궐을 떠나 거동할 때면 그 날이 바로 노는 날인 듯 장안 사람들이 함뿍 거리로 쏟아져 나와 길을 메웠다. 거동 행렬이 뚫고 나가기 어려울 정도로 처마 밑에서부터 길을 뒤덮고 네거리마다 빈틈이 없었다.
1886년 신학문 교사로 우리 나라에 왔던 미국인 선교사 「조지·W·길모」의 표현을 빌면 『새롭고 이상스런 것을 구경하러 모이는 것이 한국사람의 특징이다.』
구한국 말에 우리 나라에 와 있던 서양 여성들의 복장이란 대개 「모네」「르놔르」등 19세기「프랑스」 화가들의 작품에서 흔히 보는 그것이다. 자루가 긴 양산을 들고 차양이 넓은 모자를 화려하게 장식해 쓰고, 앞가슴은「프릴」이 화사하며 치렁치렁 긴치마엔 아래위로 주름 잡은 것이 보통이다. 허리를 질끈 동여 뒤로 매었는데 치마 속이 바람을 잡은 것 같아, 흡사 우리나라 아낙네의 무지기 (속치마)를 연상케 하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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