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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공약의 허실 분석|이달의 종합지|윤근식 <성대 교수·정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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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4월27일은 경험주의적 입장으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는 원리 즉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국민 주권설을 또 다시「테스트」해보는 날, 제7대 대통령 선거의 날이다. 지금 우리의 생활 주변에는 대중에 대한 깊은 불신에 뿌리 박고 있는 많은 「정치적 상품들」이 실은 대중위에 군림할 「지배자」가 되기 위하여 범람하고 있다. 각기 그들은 자기 정당이야말로 「민주적인 앨리트」라는 간판을 내세우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깊은 불신」으로부터 「조작된」(?) 상품들이 과연 「대중의 자치 사상」을 어떻게 「복권」시키며 제도화할 것인지는 의문스럽다.
이정식씨는 그의 글 『선거 공약의 이상과 한계』 (월간 중앙) 에서 정치에 「의해서」살려고 하는 우리 나라 직업 정치인의 자세론으로부터 출발하여 정치적 낭만주의가 결여되었다는 뜻에서 『낭만적인 정치 여행을 즐긴 행각』으로 한국 정치사의 흐름을 규정하고 정치를 「위해서」 사는 직업 정치인의 필요성을 은연중 강조하고 있다. 즉 정치에 「의하여」살려고 하는 정치인은 정치의 부정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이처럼 정치인으로서의 능력을 갖추지 못한 정치인의 권력에 대한 강한 욕구가 선거 공약을 단순한 정치 조작으로 타락시키고 정당 강령을 공약화하게 된다고 한다.
이러한 정치인에게는 사명감 또는 가치 정립을 위한 상황적 분석 능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공약을 공약화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공약은 흔히 『미래 학자의 과학적인 예언을 빙자한 이상향의 구상』으로 되어 4년이라는 집권 시한성을 벗어난 공약으로 나타나고 그리하여 현실과 정치를 괴리시킨다고 한다. 공약화에 의하여 유권자들에게 만들어지는 허위의식이 축적되면 탈 정치 현상까지 빚어내기 쉽다는「경고」로 끝을 맺고 있다.
정치 권력의 사회 구조적 조건에 대한 문제를 고도에 소개시켜 놓고 다만「정치가론」에서 출발하고 있는 이씨의 글과 좀 대조적인 것은 임종철씨의 글 『경제적 미래상에 대한 국민의 기대와 정당의 공약』(정경 연구)이다. 임씨는 경제 체제론에서 출발하여 제일 야당인 신민당의 경제 정책 이론, 즉 대중 경제론과 선거용 공약 내용을 분석 비판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대중 경제가 요구하듯이 주식의 대중화가 이루어지면 노사라는 대립적인 계층은 없어진다는 근거에서 『주식 대중화와 정면으로 대립되는 기구인 노사 협의 체제 구성을 주장한다는 것은 「난센슨」』이며 「주식 대중화」와 「종합 경제 계획의 수립」과 「노사 협의체의 구성」과는 원리적으로 모순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계급 없는 사회로서의 「주식의 대중화」와 이윤의 명제로부터 출발하는 노사 협의 체제 구성은 모순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제의 기본 조직 원리의 이율 배반성·혼돈성을 근거로 야당의 미래상을 『미래 사회에 대한 투시가 없는 혼돈과 답보의 상징』이며 신민당의 사회 철학은 전국 경제인 연합회의 그것보다도 「불분명한 것」으로 후퇴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임종철씨는 동시에 월간 「중앙」 4월호에 실린 그의 글 『경제 개발, 이대로 좋은가』 에서 제3차 5개년 경제 계획의 문제점을 다루면서 비판하고 있다. 그는 제3차 5개년 계획이 표방하고 있는 「농어촌 경제의 혁신적 개발, 수출의 획기적 증대 및 중화학 공업의 건설」 이라는 삼대 투자 우선 순위간에 유기적 연관성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계획의 무계획성을 낱낱이 지적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선건설 후분배」라는 그릇된 개발 철학의 소산이라고 단정함으로써 「개발 철학의 빈곤」을 탓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다른 편에서는 계획 작성의 기술 부족으로 인하여 『정치 지도자들의 「비전」을 계획 내용에 구체화하는데 있어 명료성과 일의성·구체성 부각에 성공하지 못하였고, 경제 계획의 본질적 속성을 계획안에 뚜렷이 하는데 실패하였다』고 결론 짓고 있다.
다시 임씨의 두 글과 관련해서 문제될 수 있는 점은 자유 기업 제도·집산주의 체제·혼합 경제 체제로의 구별이라는 경제 체제론에서 출발할 때 적어도 혼합 경제 체제라는 말만으로는 간섭 국가 (복지 국가) 론이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그 사회 체제를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사회 철학은 파악될 수 없다는 점이다.
영국의 「고전적」 자본주의 형성시에 있어서도 경제 활동의 조건 형성은 국가 (정치 권력)의 광범한 협력 밑에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월간 중앙」에 실린 『자본주의는 변하고있다』는 「갤브레이드」의 주장을 둘러싼 「세기의 대논쟁」은 이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4월」하면 우리는 언제나 4·19를 기억한다. 그래서인지 「신동아」에서는 학생 운동 문제를 다루고 있고 「세대」는 이영일씨의 『4월 혁명의 발전론적 고찰』 이라는 글을 싣고 있다. 이씨는 신생국 정치 상황을 독립 변수로 놓고 대담하게 「평가의 변용」 을 시도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4월 혁명은 단순히 자유와 민주주의 (서구적 의미의 민주주의) 를 위한 민중의 자발적 혁명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보다는 후진국 국민들이 일반적으로 겪고 있는 빈곤, 우울, 압제, 굴욕같은 욕구 불만, 좌절감을 해소하기 위한 대중의 혁명(행위)』이다.
그 근거로서 이씨는 「민주주의와 독재주의」에 대한 일반의 이해도가 상당히 낮다는 조사 결과와 군사 혁명 정권이 중립 개념으로서의 「질서」「경제 건설」및 「근대화」를 약속했을 때 국민이 이를 환영했다는 사실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의 경우 이씨도 말하고 있듯이 혁명에 작용한 참된 「힘의 본질을 객관화」하려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주관적인 사실」만에 의하여 가능한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가 제기된다. 예를 들어 노동자의식이 형성되지 않았다는 조사 결과에 의하여 적어도 『노동자가 객관적으로 존재치 않는다』는 결론을 도출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닐까. 여하튼 잘못하면 「힘의 본질」을 낡은 「르·본」의 「군중 심리」로 환원시켜 버릴 위험성을 저버릴 수는 없다.
한완상씨는 그의 글 『학생·청년 문화의 동과 서』(신동아)에서 후기 산업 사회 (북)와 「후진 사회」(남)에 있어서의 학생 문화의 차이점을 밝히고 있다. 그에 의하면 한국 대학생의 가치관은 어떤 대상 (「경제 건설」·「주체성 확립」·「근대화」등등)에 대해선 퍽 보수적이면서도 다른 대상에 대해선 급진적인 두가지의 「상극적인 요소의 혼재」이고 이것은 대학 문화의 미 형성을 뒷받침해 주는 증거라 한다. 따라서 한국 학생 운동은 수단에 있어서는 「개혁적」이어서 파율적일 수 있으나 그 목적 설정과 목적 의식에 있어서는 「체제 긍정적」이며 「준율적」이라 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 한국 대학생의 하위 문화는 그들의 가치관의 「상극성」과 모호성 속에서도 「다분히 보수성」을 띠고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이 경우 그는 「대학 기능의 상극성」, 「기회 구조의 취약성」과 관련시켜 가치관의 「상극성」을 설명한다.
그러나 각도를 달리하여 냉전 체제의 논리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으로부터 출발하여 「학생·청년 문화의 북과 남」을 다룬다면 그것은 한씨의 주장을 보완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특히 이 경우 『만일 내가 GM 사장이라면 온 세계의 민족주의에 보조금을 내서 각각 제나름대로의 길을 나아가게 할 것』이라는「미셀·알베르」의 생각 (「세기의 대 논쟁」참조) 을 빌어 한씨가 말하는 미 형성된 한국 대학생의 하위 문화를 설명하려들 때 「평등의 원리」 (「민주주의」=한씨가 말하는「급진성」) 를 구현하는 우리 자신의 경제 개발 「모델」 (생활 양식)을 통한 민족 주체성의 확립 (「민족주의」=한씨가 말하는 「보수성」)을 의식하고 있는 것이라면 한국 대학생 의식의 「상극성」에 관한 설명은 좀더 자제한 설명을 필요로 한다해서 지나친 욕심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와 관련해서 『「루디·두츠케」나 「다니엘·콩방디」의 사상을 이해할 수는 있읍니다만 우리들의 문제는 그들의 문제와는 다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처한 역사에 대한 책임의식에서 행동하고 있다』 (신동아) 는 젊은이 김종오씨의 말을 다만 「머튼」의 낱말들이나 「상극성」이라는 「카테고리」로 해소시켜 버릴 수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던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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