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J Report] '米國' 들어온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2면

[일러스트=차준홍 기자]

지난 10일 충남 서산군 고북면 남정리 들판. 천수만으로 흘러드는 물길을 막고 흙을 부어 만든 서산간척지의 일부다. 끝없이 펼쳐진 황금 들판에 누렇게 익어 고개를 숙인 벼이삭이 수확을 기다리고 있다. 올해는 사실상 태풍이 한 차례도 오지 않아 대풍작이다. 이곳에서 논 33ha(약 10만 평)를 경작하는 권혁진(60)씨는 지난달 30일부터 두 아들과 함께 수확을 시작했다. 하지만 풍년을 맞은 권씨의 표정엔 기쁨보다 근심이 가득하다. 권씨는 “내년이 지나면 쌀 시장이 개방된다는데 쌀값은 떨어지는데 빚만 늘고 있다”며 “앞으로 어떻게 농사를 지으라는 건지 한숨만 나온다”고 한탄했다.

 쌀 시장 개방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시장 개방을 막아오던 관세화 유예 기간이 내년 말로 끝나서다. 관세화는 곧 시장 개방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정부는 늦어도 올해 말까지는 관세화 유예 종료에 따른 대책과 쌀 산업 발전 방안을 마련한다는 방침을 세워두고 있다. 규정에 따르면 한국은 관세화 유예 조치가 끝나기 90일 전인 9월 말까지는 세계무역기구(WTO)에 정부 입장을 통보해야 한다. 이동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지난달 11일 국회 농림해양수산위원회에 참석해 “정부가 방침을 확정한 것은 아니지만, 현재와 같은 여건이면 쌀 관세화가 유리한 측면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과 같은 농민단체들은 쌀 관세화가 시작되면 쌀 수입량이 늘어나 국내 농촌이 피폐해질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과연 관세화로 쌀 시장이 개방되면 우리나라 쌀 산업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사실 우리나라 국민 상당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외국 쌀을 들여와 소비하고 있다. 시장 개방을 뜻하는 관세화를 미뤄온 대신 그간 의무적으로 수입해온 ‘최소시장접근(MMA)’ 물량의 쌀이 그것이다. 정부는 지난해 36만8000t의 쌀을 의무 수입했다. 이 중 30%(11만400t)가 밥쌀용으로 시중에 유통됐다. 수입 쌀은 공매 과정을 거쳐 시중에 유통된다. 일부 기업체의 구내식당이나 ‘함바’로 불리는 건설 현장 식당 등이 공매에 참여하는 주요 고객이다. 상당수의 시중 식당에서도 원산지를 표기하지 않고 수입 쌀을 손님 밥상에 올리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한 끼 밥값이 상대적으로 싼 지역의 식당 중 적지 않은 곳이 수입 쌀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식당에서 수입 쌀을 쓰는 것은 자유지만, 원산지를 ‘○○산’이라고 표기하지 않으면 불법이다. 밥쌀용을 제외한 나머지 70%도 가공용으로, 과자나 고추장 등의 원료로 국내에 유통되고 있다.

 쌀 의무수입은 1995년 시작됐다. 93년 말 타결된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에서 관세화로 대표되는 쌀시장 개방을 유예하는 대신 매년 의무수입 물량을 늘려 가는 방식으로 합의하면서부터다. ‘예외 없는 관세화’ 원칙에 대한 일종의 ‘페널티’였다. WTO에 가입한 이상 관세화 또는 의무수입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첫해 5만1000t으로, 국내 소비량의 1%에 불과하던 의무수입 물량은 1차 유예 기간이 끝난 2004년 20만5000t까지 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밥쌀용 쌀 수입은 없었다. 전량 가공용으로만 사용됐다. 이후 정부는 다시 협상을 벌여 2014년을 기한으로 관세화를 유예했다. 대신 의무수입 물량을 매년 2만t씩 늘려야 했다. 이로 인해 2005년 22만5000t이던 의무수입 물량은 올해 38만8000t, 마지막 해인 내년엔 40만9000t을 수입해야 한다. 두 번째 유예 기간인 2005~2014년엔 가공용뿐 아니라 밥쌀용도 수입해야 했다. 2005~2010년까지는 전체 수입 물량의 10%를, 이후엔 30%까지 늘려야 했다. 시중에 풀린 밥쌀용 물량은 2005년 2만2000t에서 내년엔 12만2000t까지 늘어난다. 지난 20년간 쌀시장 개방을 미루는 사이 의무수입 물량은 꾸준히 늘어난 것이다.

 쌀 수입 관세화 유예 기간 종료를 앞둔 한국 정부의 고민이 바로 여기에 있다. UR협상에 따르면, 쌀시장 개방으로 관세화할 경우에도 관세화 시행 직전 연도에 적용하던 의무수입 물량은 계속 유지된다. 또 의무수입 물량은 5%에 불과한 저관세로 들여와야 한다. 설상가상 국내 쌀 소비량은 매년 줄어들고 있다. 국내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2000년 93.6㎏이었지만 지난해에는 69.8㎏으로 급감했다. 10여 년 사이에 우리나라 국민이 전보다 쌀을 25%나 덜 먹게 됐다는 얘기다. 5%의 저관세로 들어오는 의무수입 물량은 2014년 수준에서 고정되는데, 쌀 소비가 계속 떨어진다면, 국내 총 쌀 소비량 중 수입 쌀이 차지하는 비중은 해가 갈수록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지난해의 경우 수입 쌀이 국내 총 쌀 소비량(490만8000t)의 7.49%에 달했다. 이에 정부는 2009년부터 쌀 수입 관세화를 당기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저관세로 들어오는 의무수입 물량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같은 주장은 여론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조기 관세화 여부를 논의하기 위해 농어업선진화위원회와 토론회 등을 여러 차례 열었지만, 뜻을 모을 수 없었다. 농림부 관계자는 “쌀 수입 관세화는 곧 쌀 시장 전면 개방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농민들의 반발이라는 정치적 부담이 컸다”고 털어놨다.

 그럼 과연 외국 쌀과 비교한 국산 쌀의 경쟁력은 어느 정도일까. 대형할인점 이마트의 10㎏들이 쌀 한 포대 가격은 2만3300~3만9500원. 이마트 PB상품인 이맛쌀(10㎏에 2만3300원)의 경우 가격이 가장 비싼 이천쌀의 59% 수준으로, 브랜드별로 가격 차가 상당하다. 올해 소비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브랜드는 값이 가장 싼 이맛쌀로, 전체 판매량의 26%를 차지한다. 쌀을 구입할 때 가격을 최우선으로 본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반면 의무수입 물량으로 들여온 미국쌀의 최근 공매 낙찰가격은 ㎏당 1400원대. 이 수준이면 도매상을 거쳐 실제 식당에서 사 가는 가격은 1600원대 이상이다. 정부는 의무수입으로 들여오는 외국 쌀의 가격경쟁력을 애써 외면한다. 농식품부 노영호 서기관은 “국산 쌀 중 싼 것은 ㎏당 1800~1900원 정도 하는 것을 감안하면 현재 수입 쌀은 가격상의 이점은 크게 없다”고 말했다.

 의무수입으로 들어오는 외국 쌀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면, 앞으로 관건은 관세화를 통해 들여오는 쌀에 붙게 될 관세율이다. 관세율은 UR협상에 따라 86~88년 당시 국내산 쌀과 수입 쌀 가격의 차이를 기준으로 정하기로 했다. 정부에서는 협상 전략상 예상 관세율을 밝히지 않고 있다. 하지만 관련 학계에서는 WTO 농업협정을 근거로 산정한 관세율을 약 400%로 예상한다. 이 기준으로 보자면 관세화를 통해 들어올 미국산 쌀의 소매가는 20㎏들이 한 포대에 8만원을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국내에서 가장 비싸다는 이천쌀의 가격과 비슷한 수준이다. 하지만 WTO에 가입한 쌀 수출국이 주장하는 최고 관세율은 150~200% 선이다. 관세화를 위한 협상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된다.

 이마트 관계자는 “최근 수입 유통기간이 짧아지면서 외국 쌀도 품질이 떨어지지 않는다”며 “최근 국제 쌀 가격 추세에 관세 400%로 외국 쌀이 들어올 경우엔 문제될 게 없지만, 앞으로 관세율이 이보다 낮거나, 400%로 정한 이후에도 조금씩 떨어지게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고 말했다.

 정부는 두 가지 선택밖에 없다고 말한다. 첫째는 관세화를 통한 쌀시장 개방이며, 둘째는 다시 한번 관세화를 유예하는 것이다. 관세화 유예의 경우, 이미 2차 연장까지 했기 때문에 2015년 이후 추가 연장은 근거가 없다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 설사 관세화를 미룬다 하더라도 5%의 저관세로 들어오는 의무수입 물량이 더 늘어나는 점도 고민거리다.

 WTO 회원국 중 아직까지 쌀시장을 개방하지 않은 나라는 한국과 필리핀뿐이다. 이웃 일본은 이미 99년 4월 관세화를 통해 쌀시장을 개방했다. 당초 UR협상에서 쌀 수입에 대해 6년간 관세화 유예를 하는 대신 소비량의 4%에서 8%까지의 의무수입 물량을 허용하는 것으로 약속했지만, 유예 기간을 2년이나 남겨두고 관세화로 전환했다. 일본 역시 의무수입 물량이 매년 늘어나는 게 부담이 됐기 때문이다.

 이후 값싼 미국·중국산 쌀이 일본으로 몰려들었을까. 아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김태곤 연구위원은 “고율관세로 일본시장에 들어오는 수입 쌀은 거의 없다”며 “오히려 쌀시장 개방으로 일본의 고급 쌀이 동남아 지역으로 수출되는 효과도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의 쌀 수입 관세화율이 약 800%로, 한국보다 한결 여유로운 면도 강점이다.

 민주당의 조일현 전 의원(현 강원도당 위원장)은 “일본은 일찍 관세화로 돌아선 데다, 그간 준비를 철저히 한 덕분에 쌀시장 개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 않다”며 “우리나라도 여러 가지 이유로 쌀 관세화가 바꿀 수 없는 현실로 다가온 만큼 농가당 경작 면적을 넓히고, 쌀농사 외에 가공과 서비스 등으로 발을 넓혀 농촌을 6차 산업화하는 것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라고 말했다.

세종=최준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