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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명의 부대(하)-학도의용병(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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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9월14일의 장사동 상륙 작전을 효시로 하여 지촌리과 당림리의 격전을 거쳐 12월19일에 한성여중에서 부대가 해체되기까지 독립 제1유격대대(일명 명부대)의 자초지종을 관계자들로부터 계속 들어보겠다.
이 증언을 종합해 보면 상식적인 이야기지만 새삼 유격전이 통상전투보다 몇배 어렵다는 것과 유격대 지휘관이나 대원들은 일반부 대원보다 소질이 월등 우수하고 철저한 훈련을 받아야한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명부대는 여러 학생의 희생으로 귀중한 교훈을 남겼다고 하겠다.
▲백운붕씨(당시 독립 제1유격대대 부관=중위·예비역소령 대구서 사업·50)
『중복되는 이야기는 피하고 8월20일께부터 밀양에서 1천명의 학생 명단을 놓고 부대를 편성했습니다. 명단 작성을 17번이나 고쳤는데 간혹 높은 곳이나 가족들로부터 빼달라는 청탁이 오기도 했어요. 9월2일에 최종적으로 7백36명의 명단을 작성, 육본에 보냈는데 이중 6백여명이 학생이었습니다. 2주간인가 훈련을 시킨 다음 9월8일에 육본 작명에 따라 기차로 부산으로 내려갔지요. 10일에 장사동 상륙의 작명을 받고 12일에는 정일권 참모총장의 사열도 받았어요. 13일 새벽 부산 제4부두에서 대원 6백97명, 장교 35명, 선원 40명 등 7백72명이 문산호에 탔읍니다.
우리의 본래 상륙 지점은 강구였는데 짙은 안개 때문에 장사동 앞바다에서 배가 좌초됐어요. 육지와 50m쯤 되는 해상에서…. 벌써 적이 일제 사격을 퍼붓는데 처음에는 꼼짝할 수도 없었어요. 선원 몇명이 헤엄쳐 밧줄을 바위에다 매고 대원들은 그 줄을 타고 상륙을 개시했읍니다. 그러는 사이에 미군기도 날아와 기총 소사를 하고요. 상륙할 때 60여명이 전사하고 90여명이 부상했어요. 나도 옆구리에 가벼운 부상을 입었읍니다.

<적 소년병 엄마 부르며 울어>
상륙하니까 대원들이 젖은 옷을 벗어 말리는 등 기분이 해이된 느낌이었어요. 낮이고 미군비행기가 오니까 적의 사격이 뜸했거든요. 대오를 수습해서 14일 하오 중으로 상륙 지점 주변의 4개 고지를 점령했읍니다.
한고지에 올라가 보니까 3명의 적 기판총 사수가 쇠사슬로 발이 묶인 채로 있어요. 둘은 15세고 나머지는 17세의 어린 소년병들이에요. 쇠사슬을 풀어주니까 엄마를 부르며 엉엉 울어요. 하도 측은해서 모두 그냥 놓아주었읍니다.
저녁 때 고지에서 내려와 보니 배치해 놓은 병력이 안보여 마을에 갔더니 부상병들을 모두 메어다 민가에 놓아두었어요. 이명흠(현재명 종훈)대대장이 그렇게 하라고 했다는 거예요. 나는 안된다고 다시 전원을 메어서 고지위로 옮겼습니다. 밤이 되면 적은 반드시 공격해올 테니까요.
그 다음 건너편 고지에 가보았더니 이 대대장이 대원들을 집합시켜 놓고 연설을 하고 있어요. 대대장에게 해가 지기 전에 빨리 병력을 고지에 배치해야 한다고 건의해서 즉시 해산 시켰지요. 이날 밤에 적 수송대를 습격해서 상당한 전과를 올리고 고지에 돌아와 보니 일부대원과 대대장이 안보여요.
알아보니 포항쪽으로 내려가서 아군과 합류한다고 떠났다는 겁니다. 할 수 없이 이날밤 전투는 내가 지휘했죠. 15일 저녁에 문산호에 돌아가 보니 이 대대장이 또 거기서도 대원들에게 연설을 하고 있습디다. 해산시키려고 하는데 육지의 적으로부터 일제 사격을 받았어요. 갑판에 올라가 보니 적이 문산호를 뺑둘러 포위했어요. 이날밤에 엎친 데 덮치는 격으로 배 안에서 폭동이 일어났어요. 대원 중에 공산「프락치」가 잠입했다가 고개를 든 거예요. 경찰과 교사 출신 대원 3명이 들고일어나 이렇게 자꾸 희생자만 내서 어떻게 할거냐고 대듭디다.
그러면서 적에 항복하자는 거예요..이자들 선동에 이미 30여명이 동조하는 눈치예요. 이렇게되자 이 대대장은 자결하겠다고 권총을 빼며 담요를 뒤집어써요. 나도 죽을 생각으로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았죠. 그러니까 대대장 연락병인 송원춘군이 잡고 늘어지며 자기도 같이 죽겠다고 해요. 송군은 18세의 소년이었어요. 갑자기 생각이 달라집디다.

<세 프락치 잡고 재 상륙전>
이런 어린 학생을 못 구하고 죽는다는 건 비겁하다는…. 엎드려 「이 어린 부하들을 살릴 능력을 주소서」하고 빌었읍니다. 이 대대장도 같이 기도를 올립디다. 고참병 몇 명을 시켜 3명의 프락치를 덮쳐 전화줄로 꽁꽁 묶었지요. 그리고는 대원을 독전해서 배에서 다시 한번 상륙전을 전개했읍니다.
이때 수류탄으로 강습하여 적 70여명을 죽었는데 우리측 피해도 많았읍니다. 16일 낮에 미군 헬기 1대가 장사동으로 날아왔는데 대원들이 서로 타려고 해서 내가 공포를 쏘며 말렸읍니다. 이 대대장이 혼자 타고「유엔」군 함대 사령부에 갔다가 5시간만에 돌아왔어요. 이때 대원들 사이에는 대대장이 혼자서만 후퇴했다는 소문이 나돌아 이를 수습하느라고 애먹었습니다. 18일에 적 척후병 한명을 잡았는데 우리 때문에 보급이 차단돼 4일째 굶고있다는 거예요. 이런 점에서 우리 유격대가 적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도 먹을 것이 없어 수류탄을 장사동 냇물에 터뜨려 물고기로 끼니를 때우기도 했어요.
20일 하오에 보슬비가 내리는데 LST 조치원호가 와서 대원들이 승선할 때 적 박격포격으로 또 30여명이 회생됐어요. 나는 부산으로 돌아온 후 대구 육군병원에서 부상한 옆구리 치료를 받고 홍천에서 대원들과 재회했습니다. 이때 대대장은 문리정 소령이었는데 11월15일에 이종훈 소령이 다시 대대장으로 옵디다. 16일에 춘천 북쪽 지촌리서 1개 연대의 잔비들과 부닥쳐 큰 전투를 벌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우리 부대는 막심한 피해를 보았어요. 춘천으로 후퇴해서 여기서는 16인조 특공대로 괴뢰군 CP를 기습해서 적 보초를 죽이고「세단」을 몰고 탈출했고요.

<배추 뿌리 나눠먹다 전사도>
19일 당림리에서 또 적과 만나 격전 끝에 우리 부대는 거의 분산됐어요. 이종훈 대대장도 부상하고 나도 팔·손·머리에 부상을 입어 실신했는데 최재명 하사와 박 상사가 업고 후퇴하다가 흩어지고 대구 청구대학에 다니다 우리 부대에 들어온 이군만 남았어요. 이군이 나를 부축하면서 며칠을 헤맸는데 하루는 이군이 밭에서 배추뿌리 세개를 캐왔어요. 한개씩 나누어먹고 나머지를 가지고 서로 더 먹으라고 권하는데 이때 적탄이 날아와 이군은 즉사하고 말았어요. 차라리 내가 죽을 것을 하는 심정입디다. 나는 11월21일에 육군병원에 다시 입원했는데 우리부대는 12월19일에 한성여중에서 해체되어 일부는 2사단 32연대에 편입되고 나머지는 뿔뿔이 헤어졌지요.』
▲서성환씨(당시동아대학2년=독립제1유격대대 통역·현 대구신명여고교사·48)『부산서 통역장교 시험에 합격하여 집에 다녀서 입대하려고 대구로 올라갔지요. 경산 외가에 가려고 거를 얻어탄 게 밀양유격 사령부로 가는「트럭」이어서 그대로 입대한 거지요. 장사동으로 갈 때 미군공병중위가 폭약사용법을 가르치는데 내가 손짓 발짓으로 겨우 통역을 했지요. 상륙 후에는 영국 함대와의 전문을 주로 번역하거나 함포 사격 거리 조정을 요청했어요. 그리고 날마다 SOS를 쳤고요.
18일에, 한 미군소령이 LST를 가지고 와서 좌초된 문산호를 구출하려고 했는데 이때도 내가 나가서 겨우 의사소통을 했읍니다. 그 소령은 20일에 다시 오겠다고 가더니 약속대로 와서 철수한거지요.』
다음의 마지막 증인의 이야기는 명부대의 상황과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은 부대원들의 숙원을 총괄적으로 대변하는 것이라 하겠다.

<대원 명예 회복 시켜줘야>
▲서상덕씨(당시독립 제1유격대대 3중대부관겸 정훈대장=소위·현합동통신 제2연락부장·46)『우리부대는 모두 학식이 있고 사기가 높아서 미군이 직접훈련과 보급을 맡으려고 했는데 무슨 이유인지 우리 군당국이 말을 안들었어요. 막상 부대를 편성해보니 지휘관의 자질이나 능력이 좋지 않아요.
그 일례로 정보참모가 양복점을 하던 사람이에요. 대원들이야 거의가 팔팔한 학생들이니까 그만이죠. 한데 훈련이 모자랐어오. 적후방에 들어간다고 괴뢰군가나 부르고 사격을 좀 배우고는 수영을 시켰어요. 장비도 말이 아니고요. 이렇게 훈련과 장비가 부족한 부대를 가지고 어떻게 그런 위험한 상륙작전을 계획했는지 모르겠어요. 부산에서는 이승만 대통령께서도 우리 부대를 사열할 정도로 군에서는 큰 기대를 건 모양이지만 사전 준비나 훈련이 너무나 소홀했지요.
장사동에 닿자마자 문산호가 좌초되고 적의 사격을 받았는데 처음에는 누구도 상륙하려고 하지 않아요. 5중대 부관 박계담 소위가 제일 먼저 바다에 뛰어들면서 돌격하니까 뒤따릅디다. 이때 파도가 높아 익사자도 많았어요. 일부는 그대로 배 안에 남아있었고요. 육지에 올라 간 대원들이 미군기와 함포의 엄호로 주년 고지를 점령했는데 이때 대원들이 웃통을 벗고 젖은 군복을 말리거나, 바닷물에 젖어 고장난 총을 바위에 대고 탕탕치면서 고쳤어요. 훈련이 덜 돼 이런 짓을 했는데 적은 최강의 대담한 대원들이라고 오인하고 맹공격을 안해와 피해가 덜 난겁니다.
여하간 어린 학생들이 이 상륙전에서 많이 회생됐는데 전사자는 물론 생존대원들의 처우문제가 아직 숙제로 남아있어요. 5·16후 증빙서류를 내라고 해서 제출했지만 아직 소식이 없어요. 속히 명예를 회복시켜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알림=다음의 학도의용병 소식을 아는 분은 중앙일보 편집국「민족의 증언」담당자 앞으로 연락해주십시오.
▲정말술씨(경남상업3년 재학중 출전)▲김낙귀씨(전주고교2년 재학중 출전·7사단9연대복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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