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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밀어붙인다고 복지사회가 오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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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정부와 새누리당이 당정협의에서 근로시간 단축과 육아휴직 확대에 합의했다고 한다. 야당은 이미 더 강력한 법안을 제출해 놓은 상태다. 이대로 가면 올해 안에 근로기준법과 남녀고용평등법 등 8개 법률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할 것으로 보인다. 이런 흐름의 배경에는 잡 셰어링(일자리 나누기)을 통해 대선 공약인 고용률 70%와 양질의 시간제 일자리 창출을 달성하려는 의도가 깔린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지나치게 서두르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물론 근로시간 단축은 우리 사회가 가야 할 방향이다. 삶의 질과 고용률을 높이기 위해서도 피할 수 없는 흐름이다. 다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보다 장시간 근로에 시달리는 현실이다. 하지만 두 가지의 선결 과제가 있다. 근로시간 단축만큼 어떻게 생산성을 끌어올릴지, 그리고 임금 보전은 어떻게 할지가 문제다. 이에 대한 사회적 합의 없이는 새로운 갈등의 불씨가 될 게 뻔하다. 근로시간 단축이 비용 상승→국가경쟁력 하락으로 이어진다면 결국 일자리 자체가 줄어드는 재앙을 맞을 수도 있다.

 육아휴직 기한을 9세로 끌어올리는 조치도 과도한 느낌이다. 아무리 남녀 고용평등과 일·가정의 양립이 중요하다 해도 국제적인 균형은 맞춰야 한다. 전 세계에서 9세까지 육아휴직을 허용하는 곳은 덴마크뿐이다. 일본은 1세, 복지 천국인 독일·프랑스조차 3세로 제한하고 있다. 2010년에 6세로 상향 조정한 데 이어 우리만 관련법안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다시 9세로 끌어올리는 것은 무리다. 기업들의 인력운용에 차질을 빚는 것은 물론 고용보험의 체력도 나빠지게 된다. 이미 육아휴직의 급여지출액은 2004년 208억원에서 지난해에는 3578억원으로 17배가 넘게 급팽창하고 있다.

 당정은 정치적 논리로 결정된 무상보육이 얼마나 큰 폐해를 불렀는지 돌아봐야 한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취업여성과 전업주부를 가리지 않고 보육·양육비를 지원하는 바람에 여성고용률을 높이거나 사회적 격차를 줄이는 데 별 효과가 없었다고 경고한 바 있다. 관련 예산이 4년 만에 2.6배나 증가한 12조3000억원으로 불어나는데도 말이다. 오히려 OECD 회원국 가운데 유일하게 0~2세 자녀를 둔 여성의 취업률이 보육시설 이용률보다 낮은 기형적인 결과만 초래했을 뿐이다.

 근로시간 단축과 육아휴직 확대는 우리 사회에 근본적인 지각변동을 일으키는 사안이다. 노·사·정 협의를 통해 사회적 합의를 충분히 이룬 뒤 입법화해도 늦지 않다. 왜 당정이 서둘러 밀어붙이는지 의문이다. 혹시 세법개정안이 차질을 빚자 고용률 70%와 복지공약을 위한 부담을 기업에 떠넘기려는 정치권의 이기주의가 깔려 있는 것은 아닌가? 지금부터라도 우리 사회의 완충 여력과 부작용을 진지하게 따져야 한다. 대기업보다 중소기업들이 당정합의에 더 강력히 반발하는 현실도 감안해야 한다. 밀어붙인다고 복지사회가 되는 게 아니다. 사회적 합의와 고통 분담 없이는 신기루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