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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4)|뭍으로 뻗은 무지개 거제대교|글-주섭일, 사진-이을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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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한려수도의 동단, 푸른 바다 위에 무지개처럼 다려가 섰다. 한반도의 남쪽 끝 경남 통영군 용남면과 거제 섬을 한줄기로 잇는 총 연장 7백40m의 거제대교.
『성덕이 너그러워 섬으로 보내시네
경파를 또 건너니 두 줄기 눈물이여
천리강산이 그저 부끄럽기만 하여라.』
우암 송시열이 귀양길에 육지를 바라보고 슬프게 노래하며 건넜고, 성웅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몰아내느라 지나쳤으며, 숱한 거제섬 사람들이 뭍을 그리워하며 배로 건널 수밖에 없던 물목-견내량에 이제 다리가 선 것이다. 태고적부터 불과 5백70m의 물목 때문에 유형지로, 왜구의 겁탈지로, 6·25때는 괴뢰군 포로수용소 등으로 설움의 역사 속에 살아온 거제주민들은 거대한 거제교가 서자 『이제야 섬사람의 굴레를 벗었다』며 환희와 희망에 부풀어있다.
거제대교는 지난 65년5월30일에 착공, 만 5년9개월 만인 오는 3월10일 준공예정으로 총 공사비 6억2천9백여 만원과 연인원 32만9천3백83명이 동원되었으며 잠함 공법 등 현대기술이 총 동원되다시피 해서 이루어졌다. 현재 99.7%의 작업진도를 보여 거의 완공된 이 다리의 교각은 해상높이 26m, 해저로 27m나 내려가 53m이며 폭은 10m로 양쪽 l.5m씩이 인도, 가운데 7m가 차도로 만들어져 이때까지 1시간씩이나 걸렸던 뱃길을 차량으로 단숨에 건널 수 있게 되었다.

<삼국시대 전에는 토후국>
이 다리의 교각을 세우기 위해 쓰인 잠함 공법은 강철로 된 조그마한 방 같은 잠함 속에 인부를 들여보내고 압축공기를 넣어 27m의 해저에 내려보내 육지에서처럼 일할 수 있는 특수방법으로서 일본에서 도입해왔다고 현장감독 추상명씨(31)가 설명했다. 이 때문에 해저작업에서는 단 1명의 희생자도 나지 않았지만 오히려 상부작업 때 2명이 추락, 희생되었다. 교각이 21개나 되는 이 공사에 들어간 시멘트만도 5천2백48t(12만3천1백부대)이며 철강재는 2천6백39t이나 되고 잠함 속에 들어가 위험한 공사를 한 기술자도 연 3만4천6백19명이라고.
거제대교가 생기기전 수 천년 동안 거제도는 섬이었기에 버려진 땅이었다. 주민들이 겪어야했던 수난과 고초, 설움은 너무나도 컸었다. 거제 섬은 삼한시대, 변한 12국 중 독노국, 또는 주노국이라 불린 토후국으로 처음 세상에 나타났다. 삼국시대 때는 신라의 양주(지금 양산)에 속하는 상주군이라 칭하고 태수를 두었으며, 고려시대에 들어와 경상도 진주 목에 속하는 현이 되었다. 고려 18대왕 의종은 정중부 난을 만나 거제섬 둔덕면 거림리에 쫓겨갔었으며, 이후 줄곧 유형지로 되곤 했다. 고려 원종 때는 왜구가 대거 침공, 폐현 되어 남부여대 거창군으로 피난해 무인도가 되기까지 했으며, 이조 세종4년에야 환도했다고 기록되어있다.

<포로수용소로 한때 유명>
임진난 때는 이순신 장군이 옥포에서 첫 승리를 거둔 이후 적진포·당포·당진포 등에서 거제 섬의 지세를 이용, 승리했으나 육전에서는 왜적에게 고현성이 함락되는 등 모두 패해 주민들은 왜적의 무자비한 약탈을 당해야만 했다. 거제섬 사람들은 세오암의 전설 속에 아직도 섬사람의 슬픔을 되새기고 있다.
7백여년 전 고려말엽, 장승포에 왜구가 들어와 방화, 살인·강간을 마구 자행했다. 이 마을 장씨 부인은 왜구에 짓밟히고 주인 장씨는 인질로 일본에 잡혀갔다. 이때부터 장씨 부인은 삭발, 중이 되어 일본 땅 대마도가 빤히 보이는 강망산 봉우리에 암자를 지어 왜구에 더럽혀진 몸을 씻고(세오) 남편을 그리는 불공을 드리며 눈물로 일생을 보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강망산의 강망은 바다건너 남편을 바라보며 기다렸다는 뜻이며, 지금도 이곳 암자를 세오암이라 부르고 있다.
6·25당시 흥남 철수 때의 피난민들이 미군 LST에 실려 10여만명이나 몰려들어 반농반어로 순박하기만 했던 거제주민들은 어리둥절했다. 게다가 1950년11월27일엔 괴뢰군포로수용소가 고현을 중심으로 1천2백여 정보에 들어서 거제 섬은 급격한 변화를 했다. 인구가 30여만(주민10여만·피난민10여만·포로10여만)으로 늘어났고, 한적한 농촌이 하루아침에 바, 비어홀, 다방, 당구장 등등 유흥가가 서는 등 흥청대기 시작했으며, 포로경비를 위해 진주한 미군들로부터 서투른 영어와 양담배를 배우기도 했다.
1950년5월7일 포로수용소사령관 프랜시스·T·도드 준장이 포로들에게 감금당해 거제 섬이 하루아침에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는데, 주민들은 『포로수용소 설치도 섬이기 때문이 아니었느냐』고 못마땅한 눈치.
이제 거제 섬은 섬이 아니다. 통영군 용남면 장평리와 거제군 사등면 덕호리를 잇는 다리를 통해 섬사람이란 굴레를 벗게 되었다. 이 다리를 착공할 때 덕호리의 노인 5명이 초대되어 꿈에나 그리던 대교의 모습이 『정말 세워질까』했었다. 공사가 진행됨에 따라 이들 노인들은 『내가 죽기 전에 다리를 건넜으면…』하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었으나 이중 3명은 완공 전에 세상을 떠났다.

<생업에 큰 도움, 관광개발도>
남은 2명의 노인은 다리가 완공단계에 이른 지난 1월, 당국의 주선으로 꿈 같기만 했던 소망을 이루었다. 두 노인은 거제 섬에서 뭍으로 뻗은 다리를 지팡이에 의지하고 건너면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먼저간 친구야, 이제 난 뭍 사람이지만 자네들은 섬사람으로 죽었구나.』 눈물을 흘렸다는 것이다.
거제대교는 13만9천여명의 주민들에게 섬사람이란 낙후감, 소외감을 없애줄 뿐만 아니라 연간 2만5천여t의 수산물(미역·멸치 등)을 육지에 적기적소에 수송할 수 있는 데다 수송비 절약만도 3천8백여만원이 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때까지 육로와 해로의 이중 수송 때문에 일상용품마저 10∼20%나 비싸게 구입해온 불편을 덜게 되었으며, 충무에서 견내량을 거쳐 성포까지 도선으로 돌았던 길이 10㎞나 단축, 충무 시와 연결되어 교통시간을 두 시간 이상이나 절약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아카시아 숲과 해송으로 아름답기만 한 36만7천3백95평방㎞의 거제섬은 문자 그대로 관광자원으로 개발, 새로운 면모를 드러낼 것이며 전기·전화 등 문명의 이기도 잇달아 다리를 통해 밀어닥칠 것이다.
수 천년 동안 버려진 땅, 현대문명의 이방지대와 같았던, 제주도 다음으로 큰 섬 거제도는 드디어 다리를 통해 그토록 바랐던 육지와 굳게 매듭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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